에너지 빈곤층을 위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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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893회 작성일Date 25-09-05 16:31본문
올 여름은 참으로 무더웠습니다.
폭염주의보가 스마트폰을 통해 하루도 빠짐없이 전달된 적은 유래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런 날들이 해마다 더 심해질 것이란 보도를 접하게 되면 마음이 심란해지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나마 에어컨을 부담 없이 종일 사용할 수 있는 가정들은 어찌 견디어 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생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특히 에너지 빈곤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난방, 냉방, 조명, 취사를 위한 ‘필수 에너지 서비스’가 필요합니다.
이런 필수 에너지를 경제적인 이유로 필요한 만큼 사용하지 못하는 가정을 ‘에너지 빈곤층’이라고 합니다.
이 용어는 1970년대 영국에서 겨울철 거실 온도는 섭씨 21도, 거실 이외에는 섭씨 18도를 유지하기 위해
지출하는 에너지 비용이 소득의 10%를 넘는 가구를 에너지 빈곤층이라고 규정한 것에서 유래합니다.
명확하게 정부나, 어떤 기관에 의해 합의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는 영국의 이 선례를 따르고 있습니다.
소득이 높은 가구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비용임에도, 소득이 낮은 가구는 그 비용을 지불할 여력이 없어서
이 폭염 속에서도 에어컨을 켜는 것은 상상조차 못 하고, 선풍기나 부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의 차이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차이를 없애기 위해 우리 정부는 2030년까지 에너지 빈곤층 0%를 목표로 잡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이 세계의 어떤 나라도 이것을 완전하게 해결한 나라는 없습니다.
그 완전한 해결점은 결코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그 답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복음을 전한 후 이 복음의 말씀이 믿은 자들 속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한다는 고백을 전합니다(살전 2:13).
바울이 끊임없이 감사한다는 것을 볼 때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역사 한다’는 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에네르게오(ἐνεργεω)’라는 단어로 우리가 잘 아는 ‘에너지’라는 단어의 어원이 됩니다.
두 단어의 합성어로 ‘안에’를 뜻하는 전치사 ‘엔’과 ‘일’을 뜻하는 ‘에르곤’의 합성어입니다.
즉 “일하고 있다, 활동하고 있다”는 뜻이 바로 ‘에너지’인 것입니다.
믿는 자들 안에서 말씀이 강력하게 에너지를 발하고 있다는 것은 곧 활력 있게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는 에너지가 될 때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당연히 말씀이 삶이 되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살전 4:9-10).
이처럼 말씀의 에너지는 살아서 주님의 뜻을 행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형제 사랑으로의 연결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삶이 온 마게도냐 지역을 덮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확신합니다.
결코 그 말씀의 에너지는 마게도냐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기에 더욱 그렇게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렇게 말씀의 에너지가 세상을 덮는 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으로 가능해집니다(살전 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활력이 있어’(히 4:12; 에네르게스) 그 에너지가 사랑을 이루어 ‘에너지 빈곤층’을 감싸 안고 그들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제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 재 구 목사
폭염주의보가 스마트폰을 통해 하루도 빠짐없이 전달된 적은 유래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런 날들이 해마다 더 심해질 것이란 보도를 접하게 되면 마음이 심란해지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나마 에어컨을 부담 없이 종일 사용할 수 있는 가정들은 어찌 견디어 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생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특히 에너지 빈곤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난방, 냉방, 조명, 취사를 위한 ‘필수 에너지 서비스’가 필요합니다.
이런 필수 에너지를 경제적인 이유로 필요한 만큼 사용하지 못하는 가정을 ‘에너지 빈곤층’이라고 합니다.
이 용어는 1970년대 영국에서 겨울철 거실 온도는 섭씨 21도, 거실 이외에는 섭씨 18도를 유지하기 위해
지출하는 에너지 비용이 소득의 10%를 넘는 가구를 에너지 빈곤층이라고 규정한 것에서 유래합니다.
명확하게 정부나, 어떤 기관에 의해 합의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는 영국의 이 선례를 따르고 있습니다.
소득이 높은 가구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비용임에도, 소득이 낮은 가구는 그 비용을 지불할 여력이 없어서
이 폭염 속에서도 에어컨을 켜는 것은 상상조차 못 하고, 선풍기나 부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의 차이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차이를 없애기 위해 우리 정부는 2030년까지 에너지 빈곤층 0%를 목표로 잡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이 세계의 어떤 나라도 이것을 완전하게 해결한 나라는 없습니다.
그 완전한 해결점은 결코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그 답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복음을 전한 후 이 복음의 말씀이 믿은 자들 속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한다는 고백을 전합니다(살전 2:13).
바울이 끊임없이 감사한다는 것을 볼 때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역사 한다’는 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에네르게오(ἐνεργεω)’라는 단어로 우리가 잘 아는 ‘에너지’라는 단어의 어원이 됩니다.
두 단어의 합성어로 ‘안에’를 뜻하는 전치사 ‘엔’과 ‘일’을 뜻하는 ‘에르곤’의 합성어입니다.
즉 “일하고 있다, 활동하고 있다”는 뜻이 바로 ‘에너지’인 것입니다.
믿는 자들 안에서 말씀이 강력하게 에너지를 발하고 있다는 것은 곧 활력 있게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는 에너지가 될 때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당연히 말씀이 삶이 되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살전 4:9-10).
이처럼 말씀의 에너지는 살아서 주님의 뜻을 행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형제 사랑으로의 연결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삶이 온 마게도냐 지역을 덮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확신합니다.
결코 그 말씀의 에너지는 마게도냐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기에 더욱 그렇게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렇게 말씀의 에너지가 세상을 덮는 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으로 가능해집니다(살전 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활력이 있어’(히 4:12; 에네르게스) 그 에너지가 사랑을 이루어 ‘에너지 빈곤층’을 감싸 안고 그들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제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 재 구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