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속에 들어 있는 특권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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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65회 작성일Date 25-05-03 13:59본문
특권이란 단어는 매력적으로 들리는 반면 책임이란 단어는 마음을 부담스럽게 합니다.
그러다 보니 특권은 누리고 싶고, 책임은 되도록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오기도 합니다.
실제로 사회의 가장 기초단위가 되는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사람이 모여 공동체를 이룬 삶의 모든 현장 속에서 이러한 현상이 드러납니다.
가정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향하여, 아내가 남편을 향하여 그리고 부모가 자식을 향하여, 자식이 부모를 향하여
책임보다는 특권을 내세움으로 관계의 심각한 문제를 가져오는 경우들이 참 많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군가는 그 반대의 경험을 하게 되는데 특권은 누리지 못하고 책임만 지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쪽은 특권만을 주장하고, 다른 쪽은 책임만 져야 한다면 얼핏 균형이 맞는 듯 하지만 그 안에 심각한 균열이 존재하고 있기에 문제의 소지가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돌아온 탕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본문을 정확하게 읽노라면 동생만 재산을 분배 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각각의 몫을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눅 15:12).
이스라엘 상속법을 살펴보면 장자에게는 두 몫의 재산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신 21:17).
그럼 장남은 두 몫, 차남은 한 몫을 받았을 것입니다. 동생은 재물을 다 챙겨서 먼 나라로 가서 다 탕진해 버렸습니다.
이 동생의 삶은 특권만 누리고, 책임은 전혀 지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방탕하게 모든 재산을 다 탕진한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대대적인 환영이 큰 아들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큰 아들의 입에서 나온 불평을 들어보면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가 드러나며, 그의 불편한 심기가 짐짓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눅 15:29).
이 큰 아들은 아버지가 두 몫의 재산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재산을 다 아버지를 위한 책임을 감당하는 것에 쏟아 부었고,
자기의 즐거움을 위한 어떤 특권도 누린 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 누군가는 했어야 할 일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져야 하니 어떤 이가 책임을 회피하면 다른 어떤 이는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분명 책임을 버리고 특권만 누린 동생보다, 아버지 곁에서 묵묵히 특권은 제쳐두고 억지로 일지라도 책임을 감당한 형이 더 바른 삶을 살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 책임을 짐에 있어서 기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아버지의 것이 다 자신의 것이라는 그 충만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짊어진 책임은 특권만 누린 사람을 향하여 정죄의 공격이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창기들을 향해 혹독한 저주의 비난을 퍼 붓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구원의 길에 무임승차하는 파렴치한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혹시 은혜만 누리려 하고,
사명의 길로 나아오지 않는 누군가가 불편하게 다가오십니까? 정죄의 화살이 입술에서 나아가고 있습니까?
회복해야 할 것은 그가 아니라, 먼저 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기쁨을 회복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 기쁨이 그것을 누리지 못한 죄인을 향하여 정죄가 아닌 불쌍히 여기는 긍휼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께서 맡겨주시는 책임 속에는 특권의 즐거움이 늘 함께합니다.
김 재 구 목사
그러다 보니 특권은 누리고 싶고, 책임은 되도록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오기도 합니다.
실제로 사회의 가장 기초단위가 되는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사람이 모여 공동체를 이룬 삶의 모든 현장 속에서 이러한 현상이 드러납니다.
가정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향하여, 아내가 남편을 향하여 그리고 부모가 자식을 향하여, 자식이 부모를 향하여
책임보다는 특권을 내세움으로 관계의 심각한 문제를 가져오는 경우들이 참 많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군가는 그 반대의 경험을 하게 되는데 특권은 누리지 못하고 책임만 지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쪽은 특권만을 주장하고, 다른 쪽은 책임만 져야 한다면 얼핏 균형이 맞는 듯 하지만 그 안에 심각한 균열이 존재하고 있기에 문제의 소지가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돌아온 탕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본문을 정확하게 읽노라면 동생만 재산을 분배 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각각의 몫을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눅 15:12).
이스라엘 상속법을 살펴보면 장자에게는 두 몫의 재산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신 21:17).
그럼 장남은 두 몫, 차남은 한 몫을 받았을 것입니다. 동생은 재물을 다 챙겨서 먼 나라로 가서 다 탕진해 버렸습니다.
이 동생의 삶은 특권만 누리고, 책임은 전혀 지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방탕하게 모든 재산을 다 탕진한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대대적인 환영이 큰 아들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큰 아들의 입에서 나온 불평을 들어보면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가 드러나며, 그의 불편한 심기가 짐짓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눅 15:29).
이 큰 아들은 아버지가 두 몫의 재산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재산을 다 아버지를 위한 책임을 감당하는 것에 쏟아 부었고,
자기의 즐거움을 위한 어떤 특권도 누린 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 누군가는 했어야 할 일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져야 하니 어떤 이가 책임을 회피하면 다른 어떤 이는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분명 책임을 버리고 특권만 누린 동생보다, 아버지 곁에서 묵묵히 특권은 제쳐두고 억지로 일지라도 책임을 감당한 형이 더 바른 삶을 살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 책임을 짐에 있어서 기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아버지의 것이 다 자신의 것이라는 그 충만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짊어진 책임은 특권만 누린 사람을 향하여 정죄의 공격이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창기들을 향해 혹독한 저주의 비난을 퍼 붓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구원의 길에 무임승차하는 파렴치한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혹시 은혜만 누리려 하고,
사명의 길로 나아오지 않는 누군가가 불편하게 다가오십니까? 정죄의 화살이 입술에서 나아가고 있습니까?
회복해야 할 것은 그가 아니라, 먼저 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기쁨을 회복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 기쁨이 그것을 누리지 못한 죄인을 향하여 정죄가 아닌 불쌍히 여기는 긍휼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께서 맡겨주시는 책임 속에는 특권의 즐거움이 늘 함께합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