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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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605회 작성일Date 25-02-28 16:36본문
예전에 광야 길을 두어 번 걸어본 적이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시내산으로 가는 여정 동안에 잠시 차에서 내려 광야를 걸어 본 것과 그 이후에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남부지역 유대 광야에서 잠시 높은 언덕을 오르며 굽이쳐 도는 지형을 바라보고 광야의 경이로움과 두려움을 목격하던 때였습니다.
시내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걸었던 길이며, 유대 광야는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 다녔던 지역들인데
아무리 긍정적으로 평가해도 저로서는 일주일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곳들이었습니다.
그런 광야의 위협적인 공포로 말미암아 평상시에는 그저 ‘머물다, 유숙하다’는 뜻으로 사용되는데 광야에만 들어가면
그 뜻이 전혀 다른 의미로 돌변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린’ 혹은 ‘룬’이라는 단어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만났을 때 “네 아버지의 집에 우리가 유숙할 곳이 있느냐?”고 묻자
리브가가 “우리에게 짚과 사료가 족하며 유숙할 곳도 있나이다”라고 응답하는 내용을 들 수 있습니다(창 24:23, 25).
그런데 동일한 단어가 광야만 펼쳐지면 ‘원망하다’라는 뜻이 되어버립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기와 민수기에서 광야에서 머물기도 하고, 이동하기도 하는 상황이 펼쳐지기에 ‘원망하다’라는 뜻은 이 두 곳에서만 주로 나타납니다
(출 15:24; 16:2, 7, 8; 17:3; 민 14:2, 27, 29, 36; 16:11, 41; 17:5).
단 한 번의 예외는 여호수아 시절 기브온 주민들이 속임수로 나아와 언약을 맺은 후
그들이 가나안 땅 안에 사는 민족임을 알았을 때 백성들이 섣부르게 맹세한 족장들을 원망했다는 곳에 나타납니다(수 9:18).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아니라는 것과 일견 타당성이 있는 원망이란 점에서 광야에서의 원망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의 원망은 궁극적 비난이 하나님을 향합니다.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2-3)
사람이 살만한 곳에서는 단순히 머물며, 유숙하는 것인데 왜 유독 광야로 들어가면 머물고, 유숙하는 것이 원망이 되어버릴까요?
그 이유는 광야에 대한 단 한 마디의 평가로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아무것도 없다’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민 20:5)
다른 말로 하면 광야는 ‘빈 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머물기 원하는 화려한 곳을 떠나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광야, 즉 빈 들로 나간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세례요한으로 그에게 빈 들은 결코 아무것도 없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한 장소였고, 그는 그 말씀의 임재로 광야에서도 원망하는 자가 아닌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빈 들로 나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회개의 소리로 화답합니다(눅 3:10, 12, 14).
이처럼 빈 들이라도 하나님과 유숙하는 자가 있는 곳은 하나님의 소리와 사람의 화답이 만나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됩니다.
김 재 구 목사
이집트에서 시내산으로 가는 여정 동안에 잠시 차에서 내려 광야를 걸어 본 것과 그 이후에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남부지역 유대 광야에서 잠시 높은 언덕을 오르며 굽이쳐 도는 지형을 바라보고 광야의 경이로움과 두려움을 목격하던 때였습니다.
시내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걸었던 길이며, 유대 광야는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 다녔던 지역들인데
아무리 긍정적으로 평가해도 저로서는 일주일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곳들이었습니다.
그런 광야의 위협적인 공포로 말미암아 평상시에는 그저 ‘머물다, 유숙하다’는 뜻으로 사용되는데 광야에만 들어가면
그 뜻이 전혀 다른 의미로 돌변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린’ 혹은 ‘룬’이라는 단어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만났을 때 “네 아버지의 집에 우리가 유숙할 곳이 있느냐?”고 묻자
리브가가 “우리에게 짚과 사료가 족하며 유숙할 곳도 있나이다”라고 응답하는 내용을 들 수 있습니다(창 24:23, 25).
그런데 동일한 단어가 광야만 펼쳐지면 ‘원망하다’라는 뜻이 되어버립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기와 민수기에서 광야에서 머물기도 하고, 이동하기도 하는 상황이 펼쳐지기에 ‘원망하다’라는 뜻은 이 두 곳에서만 주로 나타납니다
(출 15:24; 16:2, 7, 8; 17:3; 민 14:2, 27, 29, 36; 16:11, 41; 17:5).
단 한 번의 예외는 여호수아 시절 기브온 주민들이 속임수로 나아와 언약을 맺은 후
그들이 가나안 땅 안에 사는 민족임을 알았을 때 백성들이 섣부르게 맹세한 족장들을 원망했다는 곳에 나타납니다(수 9:18).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아니라는 것과 일견 타당성이 있는 원망이란 점에서 광야에서의 원망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의 원망은 궁극적 비난이 하나님을 향합니다.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2-3)
사람이 살만한 곳에서는 단순히 머물며, 유숙하는 것인데 왜 유독 광야로 들어가면 머물고, 유숙하는 것이 원망이 되어버릴까요?
그 이유는 광야에 대한 단 한 마디의 평가로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아무것도 없다’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민 20:5)
다른 말로 하면 광야는 ‘빈 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머물기 원하는 화려한 곳을 떠나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광야, 즉 빈 들로 나간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세례요한으로 그에게 빈 들은 결코 아무것도 없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한 장소였고, 그는 그 말씀의 임재로 광야에서도 원망하는 자가 아닌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빈 들로 나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회개의 소리로 화답합니다(눅 3:10, 12, 14).
이처럼 빈 들이라도 하나님과 유숙하는 자가 있는 곳은 하나님의 소리와 사람의 화답이 만나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됩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