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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비난인가, 긍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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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669회 작성일Date 25-02-08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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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단체에서든지 리더인 누군가가 조언을 하였을 때 귀담아 듣고 따를 때가 있는가하면 그 반대로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간혹 정말 따라야 할 조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따르지 않아 심각한 곤경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리더라면 자신의 조언대로 따르지 않아서 발생한 치명적인 결과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여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봅니다.
여기 두 가지 경우를 통해 그리스도인 리더다운 태도를 살펴봅니다.

    먼저 구약의 창세기에서 야곱의 첫째 아들인 르우벤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시도할 때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고
요셉의 생명은 해치지 말고 광야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의도는 적당한 때를 보아서 요셉을 구출하여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는 것이었습니다(창 37:21-22).
형제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가두며 상황이 르우벤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앞장서 요셉을 상인들에게 팔아치우는 것으로 상황이 종료되어버렸습니다.
르우벤이 참담하여 옷을 찢고 어떻게 아버지의 얼굴을 대면하나 탄식하는 장면으로 일단락됩니다.

    그 후 가뭄 때에 형제들이 애굽에 곡식을 사러 갔다가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에게 정탐꾼으로 몰려 감옥에 삼 일 동안 갇혔다 풀려나게 됩니다.
그리고 요셉이 한 명의 형제는 감옥에 수감되어 있고 나머지는 가서 막내 아우를 데려오면 정탐꾼이 아닌 것으로 알겠다는 말을 합니다.
형제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상기하며 요셉에게 몹쓸 짓을 한 것이 이렇게 자신들에게 돌아오게 되었다고 탄식할 때 르우벤이 입을 엽니다: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창 42:22).
바른 말이지만 이렇게 비난으로 질책하고는 아무 대책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움입니다.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아서 당하는 치명적인 고통에 대하여 비난과 질책이 답이 아니라, 해결책이 답입니다.
그것이 리더가 가야 할 길입니다.

    여기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결국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호송되어 갈 때 뱃길이 지연되어 계절적으로 항해가 위험스럽게 느껴졌을 때 조언을 합니다: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화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행 27:10).
그러나 호송책임자인 백부장은 바울의 말을 무시하고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고 항해를 감행합니다.
결국 배는 광풍 유라굴로를 만나 짐도, 배의 기구도 버리고 276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구원의 소망이 없이 죽음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 때 바울이 모든 사람들의 가운데 서서 입을 다시 엽니다: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행 27:21).

  이 말은 비난도, 질책도 아닙니다. 안타까움을 전하는 것입니다.
재산인 짐도, 배도, 생명도 안전하게 지키며 살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것을 무시함으로 다 잃게 된 상황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고 선포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통해 이 사람들을 위로하며, 안심시킵니다.
이렇게 비난이 아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며, 그 마음을 따르는 리더를 통해 하나님은 또다시 최선의 길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