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은 만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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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233회 작성일Date 24-10-19 16:25본문
구약과 신약을 연속해서 읽다 보면 많은 의문점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 중에 한 가지를 들라고 한다면 단연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한 것입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누리며, 주변에 영향력을 뿌리는 삶을 강조한다면
신약은 주의 제자로 좁은 문, 좁은 길인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주를 따르는 삶을 통해 소금과 빛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 따름에는 생명을 내어놓는 결론에 이르기까지라는 것이 강조되기도 합니다.
이 차이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하나님께 은혜 받은 만큼만 우리는 행하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는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구원받은 은혜를 누렸으니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누린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도 받은 대로 빚에 눌려 있는 사람들을 해방하고,
돈이 없어 고난 가운데 거하고 있는 사람을 구제하며, 종으로 팔려 자유를 잃은 사람들을 자유케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구약의 그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이렇게 우리 하나님은 결코 과한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것처럼 다섯 달란트 받은 자에게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 받은 자에게는 두 달란트를 기대하실 뿐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마 25:24)는 하나님을 철저히 오해한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8)고 말씀하셨습니다.
ㅣ그렇다면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구약시대에 비해 얼마나 많이 받은 존재인지를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를 다 사하시고, 그 영원하신 생명을 기꺼이 우리를 위해 다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이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가 가득하다면 우리 또한 이와 같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만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ㅣ그럼 “왜 구약시대 때 십자가의 사랑을 행치 않으셨나?”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이 땅에 오실 준비를 하셨습니다.
이 땅에 십자가를 통한 구원자로 오실 때 비록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고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을지라도”(사 53:2)
그 하나님을 메시아로 알아볼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로 인류의 죄를 사하심으로 우리의 삶에 완전으로의 새 지평이 열렸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는 새 시대의 법을 주십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은 분명 구약에도 주어진 것인데 왜 ‘새 계명’이라 하시는 걸까요?
구약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였다면 신약의 새 계명은 사랑의 기준이 달라졌습니다.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영원하신 생명을 주신 것 같이 우리도 그렇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것이 영원한 생명이며, 그 생명주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김 재 구 목사
그 중에 한 가지를 들라고 한다면 단연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한 것입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누리며, 주변에 영향력을 뿌리는 삶을 강조한다면
신약은 주의 제자로 좁은 문, 좁은 길인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주를 따르는 삶을 통해 소금과 빛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 따름에는 생명을 내어놓는 결론에 이르기까지라는 것이 강조되기도 합니다.
이 차이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하나님께 은혜 받은 만큼만 우리는 행하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는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구원받은 은혜를 누렸으니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누린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도 받은 대로 빚에 눌려 있는 사람들을 해방하고,
돈이 없어 고난 가운데 거하고 있는 사람을 구제하며, 종으로 팔려 자유를 잃은 사람들을 자유케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구약의 그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이렇게 우리 하나님은 결코 과한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것처럼 다섯 달란트 받은 자에게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 받은 자에게는 두 달란트를 기대하실 뿐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마 25:24)는 하나님을 철저히 오해한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8)고 말씀하셨습니다.
ㅣ그렇다면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구약시대에 비해 얼마나 많이 받은 존재인지를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를 다 사하시고, 그 영원하신 생명을 기꺼이 우리를 위해 다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이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가 가득하다면 우리 또한 이와 같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만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ㅣ그럼 “왜 구약시대 때 십자가의 사랑을 행치 않으셨나?”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이 땅에 오실 준비를 하셨습니다.
이 땅에 십자가를 통한 구원자로 오실 때 비록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고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을지라도”(사 53:2)
그 하나님을 메시아로 알아볼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로 인류의 죄를 사하심으로 우리의 삶에 완전으로의 새 지평이 열렸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는 새 시대의 법을 주십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은 분명 구약에도 주어진 것인데 왜 ‘새 계명’이라 하시는 걸까요?
구약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였다면 신약의 새 계명은 사랑의 기준이 달라졌습니다.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영원하신 생명을 주신 것 같이 우리도 그렇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것이 영원한 생명이며, 그 생명주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