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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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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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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256회 작성일Date 24-09-21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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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네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을 살펴보면 짐승같이도 아닌, 짐승만도 못한 모습일 때가 참 많습니다.
짐승들이 새끼를 낳아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며 애착을 갖고 돌보는 것을 보면
사람이 자녀를 학대하여 죽음의 길로 몰아가는 것이 이상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짐승들이 비록 다른 짐승을 사냥하여 생명을 영위하는 잔인함이 있지만 살려고 먹기 위함 외에는 살생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 피조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동료 인간을 해치고, 죽이는 잔혹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소중함이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 하나님의 그 깊고도 넓은 사랑을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고, 믿고 고백할 수 있으며,
전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단히 사람을 찾으시고, 부르셔서 피조세계 전체에 그 크신 사랑을 증거하기를 소망하십니다.
자연만물 심지어 짐승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삶으로 증거 하기를 소망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 이 증인의 역할을 못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무너지고,
세상은 발생한 일이 하나님으로 인함인지, 우연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게 됩니다.
사무엘서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빼앗은 법궤로 인해 고통을 당할 때 그것이 하나님 때문인지, 우연인지 혼선을 빚습니다.
그래서 분별을 위해 시험을 합니다. 법궤를 돌려보내는데 젖 나는 소를 두 마리 고릅니다.
젖 나는 소라는 것은 지금 새끼를 낳아 젖을 먹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짐승에게도 모성애라는 것이 있고,
그 새끼를 향한 애타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의도적인 선택입니다.
그리고 새 수레를 만들어 법궤를 싣고, 소들이 끌게 하고, 송아지들은 떼어서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만약 이 소들이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로 향하여 직진해서 가면 그 신이 행한 일이고,
그렇지 않고 집에 있는 새끼에게로 향하면 우연히 발생한 것으로 알자는 것입니다.

    소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주인의 인도함이 없다면, 아는 것은 자신의 집이고,
새끼들이 있는 곳이기에 본능적으로 그곳을 향할 것입니다.
그런데 소들이 반대 방향인 벧세메스를 향하여 직진하여 갔고, 갈 때에 울면서 갔다고 합니다.
새끼들을 향한 간절함이 가득하기에 그 쪽을 향하여 울부짖음에도 자신의 감정대로 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움직이는 그 소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 마지막도 결국은 하나님께 온전히 다 올려드리는 번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다 보고서야 블레셋의 다섯 방백들이 자기들의 땅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삼상 6:16).
짐승들이 그 본능 따라가 아닌 신의 뜻을 따라 좌우로 치우침 없이 그 길을 걸어
마침내 생명 다한 제물이 되기까지를 다 보고서야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인정하고 돌아간 것입니다.

    이 두 짐승의 이야기는 이제 이스라엘의 삶이 되고,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이 우연인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인지를 알아볼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이 짐승들이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자신의 감정이나, 본능을 거슬러 진리의 길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살아갈 때 세상은 그 삶이 우연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능도, 감정도 기꺼이 꺾어 올려드리면서도 우리 마음에 감사가 넘치게 하시는 그분이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느끼고, 돌이켜, 하나님을 주로 고백케 하기 위함입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