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질인가, 알맹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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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662회 작성일Date 24-05-18 13:00본문
종교생활과 신앙생활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가장 단순화 시켜 표현하자면 종교는 생명력이 없는 책임과 의무로 가득한 짐스러운 것이라면,
신앙은 은혜로 인한 감사로 기쁨과 활력이 가득한 자발성에 그 핵심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와 신앙의 차이를 가시적으로는 쉽게 구별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삶의 실천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로는 분간이 가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안에 자원하는 심령의 기쁨은 없을지라도 종교생활도 신앙생활 못지않게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럼 무엇으로 구별할 수 있을까요?
유대인들의 삶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만 비교해 보아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과 율법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며 신성시 합니다. 그것을 악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전과 율법은 분명 그것을 명령하신 주인이 있습니다.
그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는 성전도, 율법도 그 존재의미를 바르게 논할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성전과 율법이 껍질이라면, 하나님은 알맹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안타까운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성전의 완성이 되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껍질인 성전과 율법을 하나님이라고 부여잡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종교적인 ‘열심’이 없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감히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껍질을 하나님이라고 우겨대며 속에 무엇이 채워져 있는지 안다면 그 답이 드러날 것입니다.
자신의 동족 유대인을 향한 바울 사도의 안타까운 심정을 들어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중심은 자신의 의로 가득히 채우고 하나님을 껍질로 방패삼아 자신의 주장을 더욱 공고하게 방어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껍질이 되고, 자신이 알맹이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하나님의 의는 바로 십자가 사랑으로 누구도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껍질을 부여잡은 사람은 그 속에 이 십자가 사랑이 없기에 초점이 자기 자신에게 맞추어 집니다.
자기 의가 가득하기에 자신의 말이나, 행함이 인정을 받지 못하고,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는다고 느낄 때면 못견뎌하며 공격적이 됩니다.
그 모든 일의 동기가 자신에게 있기에 정당한 존중을 받지 못한다고 여길 때 행복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닌 자신이 중심에 자리하여 기준이 되어 있기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되고, 정죄하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은 자신도 불행할 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힘겹게 만드는 이중고를 겪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해서, 스데반에게 이를 갈았다”(행 7:54 새번역).
그러나 신앙의 사람은 속은 하나님으로 채우고 자신은 껍질이 될 뿐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 안에 언제나 감사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알맹이가 되시니 모든 상황과 사건들을 하나님의 시선과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때로 악한 일들까지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유를 여쭈며 설사 그 순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의 원대한 그림에 자신의 뜻을 기꺼이 맞춥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인한 감동이 배어나와 껍질까지도 빛이 나는 삶으로 세상에 증거합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 6:15).
김 재 구 목사
가장 단순화 시켜 표현하자면 종교는 생명력이 없는 책임과 의무로 가득한 짐스러운 것이라면,
신앙은 은혜로 인한 감사로 기쁨과 활력이 가득한 자발성에 그 핵심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와 신앙의 차이를 가시적으로는 쉽게 구별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삶의 실천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로는 분간이 가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안에 자원하는 심령의 기쁨은 없을지라도 종교생활도 신앙생활 못지않게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럼 무엇으로 구별할 수 있을까요?
유대인들의 삶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만 비교해 보아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과 율법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며 신성시 합니다. 그것을 악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전과 율법은 분명 그것을 명령하신 주인이 있습니다.
그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는 성전도, 율법도 그 존재의미를 바르게 논할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성전과 율법이 껍질이라면, 하나님은 알맹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안타까운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성전의 완성이 되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껍질인 성전과 율법을 하나님이라고 부여잡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종교적인 ‘열심’이 없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감히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껍질을 하나님이라고 우겨대며 속에 무엇이 채워져 있는지 안다면 그 답이 드러날 것입니다.
자신의 동족 유대인을 향한 바울 사도의 안타까운 심정을 들어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중심은 자신의 의로 가득히 채우고 하나님을 껍질로 방패삼아 자신의 주장을 더욱 공고하게 방어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껍질이 되고, 자신이 알맹이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하나님의 의는 바로 십자가 사랑으로 누구도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껍질을 부여잡은 사람은 그 속에 이 십자가 사랑이 없기에 초점이 자기 자신에게 맞추어 집니다.
자기 의가 가득하기에 자신의 말이나, 행함이 인정을 받지 못하고,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는다고 느낄 때면 못견뎌하며 공격적이 됩니다.
그 모든 일의 동기가 자신에게 있기에 정당한 존중을 받지 못한다고 여길 때 행복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닌 자신이 중심에 자리하여 기준이 되어 있기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되고, 정죄하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은 자신도 불행할 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힘겹게 만드는 이중고를 겪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해서, 스데반에게 이를 갈았다”(행 7:54 새번역).
그러나 신앙의 사람은 속은 하나님으로 채우고 자신은 껍질이 될 뿐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 안에 언제나 감사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알맹이가 되시니 모든 상황과 사건들을 하나님의 시선과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때로 악한 일들까지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유를 여쭈며 설사 그 순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의 원대한 그림에 자신의 뜻을 기꺼이 맞춥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인한 감동이 배어나와 껍질까지도 빛이 나는 삶으로 세상에 증거합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 6:15).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