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한자성어 ‘충만동행(充滿同行)’ 혹은 ‘동행충만(同行充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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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018회 작성일Date 24-01-06 12:37본문
해마다 연말이 되면 전국 대학 교수들이 모여 그 해 우리사회를 대변할 수 있는 한자성어를 택합니다.
얼마 전에 지나간 2023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간 4년의 세월을 돌아보며 각 해의 한자성어를 살펴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 들었습니다.
2020년은 ‘아시타비(我是他非)’로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라는 뜻이며, 현대의 신조어인 ‘내로남불’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2021년은 ‘묘서동처(猫鼠同處)’로 ‘고양이와 쥐가 함께 있다는 뜻’이며 이는 도둑을 잡아야 할 사람이 도둑과 한패가 되었다는 의미로
부정부패나 비리가 만연한 상태를 비판하는 말입니다.
2022년은 ‘과이불개(過而不改)’로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칠 줄 모른다’는 뜻으로 반복적으로 행하는 실수나, 실패를 통해서도 배우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작년 2023년은 ‘견리망의(見利忘義)’로 ‘눈앞의 이익이 보이면 의리를 저버린다’는 뜻이며, 사회 전반에서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느라
진정한 가치를 잃어버리는 해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요 근래 몇 년 동안 어느 한자성어 하나 각 해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런 세상은 각자도생이며, 적자생존이라는 살벌한 정글의 법칙을 그대로 연상시킵니다.
이 모든 실패의 원인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봅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라는 생각은 결국 사람이 판단기준이 되니 옳고, 그름을 올바로 판별할 수 없게 된데서 벌어진 일일 것입니다.
고양이와 쥐가 함께 있다는 것 또한 잘못된 판단으로 함께 하지 말아야 할 존재들이 같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는 것은 곧 잘못된 것이 푯대로 서 있으니 고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눈앞의 이익이 보이면 의리를 저 버리는 것 또한 무엇이 진정한 이익인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근시안적 시선으로 인한 것이니
인간의 한계가 그대로 드러나는 삶입니다. 이 모두는 결국 한 가지로 원인이 모아지는데 그것은 ‘기준’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건물을 지을 때도 기초가 되는 주춧돌을 놓고, 담을 쌓을 때도 다림줄을 내려 수직을 살피며, 금과 은은 그 품질을 판별하는 시금석이 있고,
각 나라에는 시시비비를 가리는 법의 기초가 되는 헌법이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에게는 마땅히 바라보아야 할 기준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사람이 늘 바라보아야 할 기준이 없다면 2023년까지뿐 아니라 영구히 매 연말의 한자성어는 늘 동일한 종류의 것들로 채워질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삶의 기초이신 모퉁이돌이 있고(엡 2:20), 바라보아야 할 푯대가 있으며(빌 3:14), 자라가야 할 분량이 정해져 있습니다(엡 4:13).
바로 우리의 기초이시며, 푯대이시며, 장성의 분량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할 때 삶의 기준이 분명해지며, 삶의 길이 반듯해집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자비와 긍휼 그리고 정의과 공의의 기준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충만한 동행이 이루어지면 당장 작년의 ‘견리망의’가 올해는 눈앞의 이익을 보면 먼저 의리를 생각하는 ‘견리사의(見利思義)’로 바뀔 것입니다.
그래서 올해의 우리 남산교회의 한자성어는 시작부터 끝까지 ‘충만동행’ 혹은 ‘동행충만’입니다.
얼마 전에 지나간 2023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간 4년의 세월을 돌아보며 각 해의 한자성어를 살펴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 들었습니다.
2020년은 ‘아시타비(我是他非)’로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라는 뜻이며, 현대의 신조어인 ‘내로남불’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2021년은 ‘묘서동처(猫鼠同處)’로 ‘고양이와 쥐가 함께 있다는 뜻’이며 이는 도둑을 잡아야 할 사람이 도둑과 한패가 되었다는 의미로
부정부패나 비리가 만연한 상태를 비판하는 말입니다.
2022년은 ‘과이불개(過而不改)’로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칠 줄 모른다’는 뜻으로 반복적으로 행하는 실수나, 실패를 통해서도 배우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작년 2023년은 ‘견리망의(見利忘義)’로 ‘눈앞의 이익이 보이면 의리를 저버린다’는 뜻이며, 사회 전반에서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느라
진정한 가치를 잃어버리는 해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요 근래 몇 년 동안 어느 한자성어 하나 각 해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런 세상은 각자도생이며, 적자생존이라는 살벌한 정글의 법칙을 그대로 연상시킵니다.
이 모든 실패의 원인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봅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라는 생각은 결국 사람이 판단기준이 되니 옳고, 그름을 올바로 판별할 수 없게 된데서 벌어진 일일 것입니다.
고양이와 쥐가 함께 있다는 것 또한 잘못된 판단으로 함께 하지 말아야 할 존재들이 같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는 것은 곧 잘못된 것이 푯대로 서 있으니 고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눈앞의 이익이 보이면 의리를 저 버리는 것 또한 무엇이 진정한 이익인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근시안적 시선으로 인한 것이니
인간의 한계가 그대로 드러나는 삶입니다. 이 모두는 결국 한 가지로 원인이 모아지는데 그것은 ‘기준’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건물을 지을 때도 기초가 되는 주춧돌을 놓고, 담을 쌓을 때도 다림줄을 내려 수직을 살피며, 금과 은은 그 품질을 판별하는 시금석이 있고,
각 나라에는 시시비비를 가리는 법의 기초가 되는 헌법이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에게는 마땅히 바라보아야 할 기준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사람이 늘 바라보아야 할 기준이 없다면 2023년까지뿐 아니라 영구히 매 연말의 한자성어는 늘 동일한 종류의 것들로 채워질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삶의 기초이신 모퉁이돌이 있고(엡 2:20), 바라보아야 할 푯대가 있으며(빌 3:14), 자라가야 할 분량이 정해져 있습니다(엡 4:13).
바로 우리의 기초이시며, 푯대이시며, 장성의 분량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할 때 삶의 기준이 분명해지며, 삶의 길이 반듯해집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자비와 긍휼 그리고 정의과 공의의 기준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충만한 동행이 이루어지면 당장 작년의 ‘견리망의’가 올해는 눈앞의 이익을 보면 먼저 의리를 생각하는 ‘견리사의(見利思義)’로 바뀔 것입니다.
그래서 올해의 우리 남산교회의 한자성어는 시작부터 끝까지 ‘충만동행’ 혹은 ‘동행충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