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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쓰레기통" 이 아닌 "감정 용광로"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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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340회 작성일Date 23-12-09 11:45

본문

사람의 감정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과거에는 없었던 용어들이 만들어집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감정 노동자’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과거에는 사람을 대하는 일을 하게 되면 별의별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때로 폭언을 듣거나,
심지어는 폭력을 경험하는 일이 있어도 그 수치스러운 갑질을 당하는 수모를 당연한 것처럼 견뎌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근래에 콜센터에서 근무하시는 분들, 아파트 경비를 하시는 분들, 공무원으로 민원을 담당하시는 분들
그리고 학부모를 대해야 하는 선생님들과 같이 다양한 직종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강도 높은 고통의 호소가 들려옵니다.
그리고 안타까운 것은 극심한 모멸감을 느끼는 폭언과 폭력과 같은 갑질을 견디지 못하고 소중한 목숨을 끊는 일들이 빈번하게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회현상의 심각성을 인식하게 되면서 ‘감정노동’이란 단어가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육체노동’만이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었다면 이제는 사람의 감정 또한 노동의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 감정노동을 하는 분들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무척이나 고무적인 일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이 감정을 쏟아붓는 쓰레기통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이 세상 인류 모두 다가 변화를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에 갑질 또한 끝이 없을 것이며,
감정노동을 하는 분들과 감정 쓰레기통 취급을 받는 분들 또한 지속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때야 할까요?
우리도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든 혹은 같은 믿음의 사람을 통해서든 때로 감정이 상하는 어렵고 힘겨운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그저 내가 갑질을 하지 않으면 되지” 정도로는 이런 상황을 해소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세상에서든, 변화의 과정 중에 있는 교회 안에서든 어느 누군가는 감정에 상처를 줄 수 있고, 상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말을 들어봅니다.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11-13)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면 분명 그 옛날에 그는 극심한 ‘감정 노동자’의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성도들의 ‘모욕, 박해, 비방’이라는 폭언과 심지어는 ‘매맞음’이라는 폭력적 갑질까지도 경험하며
자신이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버렸다는 뼈아픈 소리를 내뱉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고백 속에는 그 어떤 격앙된 감정의 폭발을 찾아볼 수 없고, 생명을 끊고 싶다는 하소연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모욕을 축복으로 돌리고, 박해를 참아내며, 비방을 따뜻한 권면으로 녹여 냅니다.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을까요? 그 다음의 바울의 말을 들어보면 그 답이 보입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고전 4:14).
그리고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다”고 덧붙입니다.
복음이라는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바울은 이제 그 사랑의 원자탄이 되어 감정 쓰레기통이 아닌 모든 것을 녹이는 감정 용광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