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기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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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025회 작성일Date 23-09-24 14:50본문
“항상 기뻐하라”는 말을 들으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쁨이 되고 마음속에 평강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왠지 모를 부담감과 더불어 주눅이 들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삶을 사노라면 기뻐할 일도 많이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어찌하든지 삶의 무게를 견디며 고민하고, 아파하며 보내기 때문입니다. 설사 그리 심각하게 고민하고 아파하지는 않을지라도 매 순간이 딱히 그렇게 기쁘게 웃으며 희희낙락 할 정도는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저만의 상황은 아닐 것이라 생각됩니다.
삶을 살아가며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요? 극심한 고통, 상실의 아픔, 갑작스런 질병이나, 만성질환, 원치 않는 다툼, 삶의 결핍들이라는 수많은 문제들 앞에서 그리스도인들도 우울한 나날을 보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 우울감이 우울증으로 깊어지고, 두려움이 공황장애가 되어 삶에 엄습해 들어오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이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가중시키는 것이 바로 정죄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인데 이렇게 감정의 늪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 정상인가? 그래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감정조차 느끼지 않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들이 마음을 심각하게 공격해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감동으로 이 말씀을 선포한 바울의 삶을 돌아보며 이 말의 진의를 깨닫고 희망을 발견합니다.
바울도 침체되어 우울하게 보낸 시간이 꽤 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환난을 당하였는데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졌던 적이 있다고 고백합니다(고후 1:8). 특히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의 관계 악화로 영적침체를 경험합니다. 관계를 회복하려고 편지를 수차례 보내고, 직접 방문하기도 하였습니다. 다시는 근심 중에 방문하지 않겠다는 것을 보면 과히 좋은 결과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고후 2:1). 그리고 편지를 보내며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고후 2:4)라고 하는 것을 보면 눈물 꽤나 흘리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디도 편에 또 다른 편지를 보내며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심령이 편치 못해’ 유럽의 마게도냐까지 건너갑니다(고후 2:13). 그 가는 거리도, 시간도 결코 짧지 않았을 터인데 그 아픈 심령이 어땠을지 짐작이 갑니다.
차라리 믿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겪는 매 맞음, 돌에 맞음, 옥에 갇혀 고난을 당하는 것에서는 감옥에서도 감사함으로 기도와 찬양으로 나아갔던 바울이었습니다(행 16:25). 그러나 같은 그리스도인 형제와 자매들로부터 겪는 아픔은 더욱 큰 고통으로 다가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욕을 당한 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 즉 참고, 비방을 받은 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다”(고전 4:12-13)는 고백은 뼈아프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런 시간들이 결코 짧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담대하게 “항상 기뻐하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바로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권면을 더하는 것을 보면 그 길이 나오는 듯합니다. 성령의 열매에 두 번째로 나타나는 것이 ‘희락’이라는 점에서 바울이 말하는 “항상 기뻐하라”는 어떤 슬픔의 흔적도, 고통도 느끼지 않아야 하며, 절망도 없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령께 속한 삶에서 결코 벗어나지 말라는 권면이 분명합니다. 성령의 사람은 슬픔에 영구히 잠식되지 않고, 절망에 아주 무너지지 않으며, 고통에 완전히 지배당하지 않고 회복으로 나아가는 탄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김 재 구 목사
삶을 살아가며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요? 극심한 고통, 상실의 아픔, 갑작스런 질병이나, 만성질환, 원치 않는 다툼, 삶의 결핍들이라는 수많은 문제들 앞에서 그리스도인들도 우울한 나날을 보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 우울감이 우울증으로 깊어지고, 두려움이 공황장애가 되어 삶에 엄습해 들어오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이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가중시키는 것이 바로 정죄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인데 이렇게 감정의 늪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 정상인가? 그래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감정조차 느끼지 않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들이 마음을 심각하게 공격해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감동으로 이 말씀을 선포한 바울의 삶을 돌아보며 이 말의 진의를 깨닫고 희망을 발견합니다.
바울도 침체되어 우울하게 보낸 시간이 꽤 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환난을 당하였는데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졌던 적이 있다고 고백합니다(고후 1:8). 특히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의 관계 악화로 영적침체를 경험합니다. 관계를 회복하려고 편지를 수차례 보내고, 직접 방문하기도 하였습니다. 다시는 근심 중에 방문하지 않겠다는 것을 보면 과히 좋은 결과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고후 2:1). 그리고 편지를 보내며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고후 2:4)라고 하는 것을 보면 눈물 꽤나 흘리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디도 편에 또 다른 편지를 보내며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심령이 편치 못해’ 유럽의 마게도냐까지 건너갑니다(고후 2:13). 그 가는 거리도, 시간도 결코 짧지 않았을 터인데 그 아픈 심령이 어땠을지 짐작이 갑니다.
차라리 믿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겪는 매 맞음, 돌에 맞음, 옥에 갇혀 고난을 당하는 것에서는 감옥에서도 감사함으로 기도와 찬양으로 나아갔던 바울이었습니다(행 16:25). 그러나 같은 그리스도인 형제와 자매들로부터 겪는 아픔은 더욱 큰 고통으로 다가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욕을 당한 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 즉 참고, 비방을 받은 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다”(고전 4:12-13)는 고백은 뼈아프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런 시간들이 결코 짧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담대하게 “항상 기뻐하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바로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권면을 더하는 것을 보면 그 길이 나오는 듯합니다. 성령의 열매에 두 번째로 나타나는 것이 ‘희락’이라는 점에서 바울이 말하는 “항상 기뻐하라”는 어떤 슬픔의 흔적도, 고통도 느끼지 않아야 하며, 절망도 없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령께 속한 삶에서 결코 벗어나지 말라는 권면이 분명합니다. 성령의 사람은 슬픔에 영구히 잠식되지 않고, 절망에 아주 무너지지 않으며, 고통에 완전히 지배당하지 않고 회복으로 나아가는 탄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