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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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010회 작성일Date 23-09-09 09:54본문
사람의 운명은 타고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다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사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엡 1:4-5)고 단언합니다.
그렇다면 그 외의 사람들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이 세상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운명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운명대로 살아가는 것이 꼭 모든 것이 평탄하고, 즐겁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모태에 짓기 전에 알았고, 배에서 나오기 전에 성별하였고,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다”고 하십니다(렘 1:5).
이미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내정되었느나, 그 삶이 결코 평탄하고, 쉽지 않을 운명의 길이 될 것이란 점은 곧이어 주어집니다.
그를 통해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서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하리라”는 것입니다.
주어진 사명이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건설하고, 심는 것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먼저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는 것이 앞설 수 있다는 것은 그 삶의 길이 얼마나 많은 부딪침 속에 거하게 될지를 짐작케 합니다.
뽑히지 않으려 강력히 저항하는 사람들이 수도 셀 수 없이 많다면 다가오는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특히나 강심장이 아니라,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한다”는 소심한 존재라면 절망과 좌절감이 교차하며 마음 깊은 속에서 울리는 탄식이 얼마겠으며,
그 탄식이 감정의 골을 파내며 흐르는 눈물이 어느 정도일지는 아무도 가늠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이렇게 부정적인 것이 앞서가고, 그 다음에 긍정의 것이 따르는 운명일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반전을 허용치 않는 분이 아니시니 역전도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운명이란 주어진 계획 속에서 최상을 이룰 수도, 최하를 향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운명에 부정적인 것을 앞세우셨다는 것은 그 운명의 역전이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를 알려주는 장치일 것입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어려서부터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는 것이 습관인 백성을 돌이키는 것은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하는 것처럼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렘 13:23).
그럼에도 뽑히거나, 파괴, 파멸 그리고 넘어뜨리는 일만은 발생치 않기를 바란 것이 그의 마음입니다(렘 18:20).
주어진 운명에서 부정적인 것보다는 최상의 것을 바라보며 그것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기를 소망하는 그 삶은 때로 죽음의 위협이 오가는 전쟁터를 방불케 할 것입니다(렘 11:21; 18:23; 38:4).
때로 어떤 사람의 운명은 이렇게 하나님의 손길 아래서 시작부터 끝까지 평안함보다는 눈물과 피로 얼룩진 탄식의 시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질곡의 시간 동안 끊임없이 여호와의 말씀이 호흡이 되며, 음식이 되는 한 설사 평안함이 없는 삶일지라도 가장 복된 삶입니다. 삶의 질곡으로 죽음까지도 생각하는 당신께 드립니다.
김 재 구 목사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사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엡 1:4-5)고 단언합니다.
그렇다면 그 외의 사람들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이 세상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운명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운명대로 살아가는 것이 꼭 모든 것이 평탄하고, 즐겁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모태에 짓기 전에 알았고, 배에서 나오기 전에 성별하였고,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다”고 하십니다(렘 1:5).
이미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내정되었느나, 그 삶이 결코 평탄하고, 쉽지 않을 운명의 길이 될 것이란 점은 곧이어 주어집니다.
그를 통해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서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하리라”는 것입니다.
주어진 사명이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건설하고, 심는 것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먼저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는 것이 앞설 수 있다는 것은 그 삶의 길이 얼마나 많은 부딪침 속에 거하게 될지를 짐작케 합니다.
뽑히지 않으려 강력히 저항하는 사람들이 수도 셀 수 없이 많다면 다가오는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특히나 강심장이 아니라,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한다”는 소심한 존재라면 절망과 좌절감이 교차하며 마음 깊은 속에서 울리는 탄식이 얼마겠으며,
그 탄식이 감정의 골을 파내며 흐르는 눈물이 어느 정도일지는 아무도 가늠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이렇게 부정적인 것이 앞서가고, 그 다음에 긍정의 것이 따르는 운명일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반전을 허용치 않는 분이 아니시니 역전도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운명이란 주어진 계획 속에서 최상을 이룰 수도, 최하를 향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운명에 부정적인 것을 앞세우셨다는 것은 그 운명의 역전이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를 알려주는 장치일 것입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어려서부터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는 것이 습관인 백성을 돌이키는 것은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하는 것처럼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렘 13:23).
그럼에도 뽑히거나, 파괴, 파멸 그리고 넘어뜨리는 일만은 발생치 않기를 바란 것이 그의 마음입니다(렘 18:20).
주어진 운명에서 부정적인 것보다는 최상의 것을 바라보며 그것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기를 소망하는 그 삶은 때로 죽음의 위협이 오가는 전쟁터를 방불케 할 것입니다(렘 11:21; 18:23; 38:4).
때로 어떤 사람의 운명은 이렇게 하나님의 손길 아래서 시작부터 끝까지 평안함보다는 눈물과 피로 얼룩진 탄식의 시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질곡의 시간 동안 끊임없이 여호와의 말씀이 호흡이 되며, 음식이 되는 한 설사 평안함이 없는 삶일지라도 가장 복된 삶입니다. 삶의 질곡으로 죽음까지도 생각하는 당신께 드립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