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메랑과 패키지의 재소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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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046회 작성일Date 23-08-02 15:12본문
피를 나눈 사이든, 아니든 사람 사이의 불화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이 성경 속에 심심찮게 나타남은 우리 삶이 그렇다는 것을 강조하는 방식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수시로 벌어지는 사건들 속에서 가장 이상적인 해결점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것에 초점이 주어집니다.
특히 창세기는 사람 사이에 벌어진 관계의 파괴는 물론 그 회복까지도 보여주는 전형적인 본을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관계의 회복을 절실히 갈망하는
이 시대를 위한 변함없는 길잡이가 됩니다. 형제들의 대표격인 유다가 질투심에 사로잡혀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요셉을 애굽에 팔아치우는데 앞장선 사건은
관계파괴의 안타까운 한 면을 보여줍니다.
유다의 속에 있던 최고가 되려는 욕망이 주신 꿈을 자랑하는 요셉의 그 오만함과 부딪쳐 결국 고통스런 파국으로 치닫게 만듭니다.
유다도, 요셉도 모두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왕권이 부여된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욕망과 오만함은 결코 공존해서는 안 되는 요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두 사람을 같은 공간에서가 아니라, 다른 공간에서 훈련하고 연단하는 계획을 진행하십니다.
유다가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팔아치우는 사건이 벌어지고, 아버지 야곱을 속이며 2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람의 눈에는 미제사건을 넘어서 완전범죄로 일단락된 듯합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사람의 눈을 초월한 하나님의 섭리는 더욱 강력하게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우선 유다는 가나안 땅에서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벌인 행각이 그 세월 동안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뼈아픈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에게 요셉이라는 아들을 잃게 만들었다면 자신도 두 아들을 잃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비록 아들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함으로 받는 징계였지만 아버지 유다에게는 자신의 살을 파내는 고통이며 뼈를 깎는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막내아들 셀라만은 잃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쫓아버렸지만 자신이 아버지를 속인 방법 그대로 다말에게 속임을 당하며
결국 “그는 나보다 옳도다”(창 38:26)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20여년의 세월동안 자신이 한 대로 동일하게 받는 부메랑을 경험하며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두 손을 듭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왕권은 결코 사람의 욕망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방법도 하나님께 맡기고 겸손히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에 그 길이 있습니다.
이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요셉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요셉은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두 번의 꿈을 통하여 그에게 왕권이 주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랑은 교만으로 이끌며 마침내 하나님같이 되어 세상이 고통 가운데 거하게 되는 왕권을 이루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도는 욕망도 내려놓고, 오만함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겸손이어야 합니다. 요셉에게 필요한 것은 낮아짐의 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옷을 계속해서 갈아입히시며 왕도를 배우게 하십니다.
자랑하던 채색옷에서, 낮은 종의 옷으로 입히시고, 또 더 낮아질 곳이 없는 죄수복으로 갈아입히시고,
후에 바로 왕을 알현하는 복장으로 갈아입게 하시고, 마침내 총리의 의복으로 입혀주십니다. 이 총리의 의복을 입었을 때
그의 자세는 형제들을 위로하며 하나님의 주권 안에 거하는 겸손이었습니다.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근심하지 마소서……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 45:7-8).
요셉의 인생은 결코 한순간에 총리가 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옷들이 종합된 패키지입니다.
오늘 그 옛날의 부메랑과 패키지를 재소환하는 것은 우리를 향한 이해할 수 없는 다양한 연단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언젠가 함께 만나서 용서와 화해, 연합을 이루기 위함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하려는 것입니다.
김 재 구 목사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수시로 벌어지는 사건들 속에서 가장 이상적인 해결점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것에 초점이 주어집니다.
특히 창세기는 사람 사이에 벌어진 관계의 파괴는 물론 그 회복까지도 보여주는 전형적인 본을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관계의 회복을 절실히 갈망하는
이 시대를 위한 변함없는 길잡이가 됩니다. 형제들의 대표격인 유다가 질투심에 사로잡혀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요셉을 애굽에 팔아치우는데 앞장선 사건은
관계파괴의 안타까운 한 면을 보여줍니다.
유다의 속에 있던 최고가 되려는 욕망이 주신 꿈을 자랑하는 요셉의 그 오만함과 부딪쳐 결국 고통스런 파국으로 치닫게 만듭니다.
유다도, 요셉도 모두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왕권이 부여된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욕망과 오만함은 결코 공존해서는 안 되는 요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두 사람을 같은 공간에서가 아니라, 다른 공간에서 훈련하고 연단하는 계획을 진행하십니다.
유다가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팔아치우는 사건이 벌어지고, 아버지 야곱을 속이며 2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람의 눈에는 미제사건을 넘어서 완전범죄로 일단락된 듯합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사람의 눈을 초월한 하나님의 섭리는 더욱 강력하게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우선 유다는 가나안 땅에서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벌인 행각이 그 세월 동안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뼈아픈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에게 요셉이라는 아들을 잃게 만들었다면 자신도 두 아들을 잃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비록 아들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함으로 받는 징계였지만 아버지 유다에게는 자신의 살을 파내는 고통이며 뼈를 깎는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막내아들 셀라만은 잃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쫓아버렸지만 자신이 아버지를 속인 방법 그대로 다말에게 속임을 당하며
결국 “그는 나보다 옳도다”(창 38:26)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20여년의 세월동안 자신이 한 대로 동일하게 받는 부메랑을 경험하며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두 손을 듭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왕권은 결코 사람의 욕망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방법도 하나님께 맡기고 겸손히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에 그 길이 있습니다.
이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요셉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요셉은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두 번의 꿈을 통하여 그에게 왕권이 주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랑은 교만으로 이끌며 마침내 하나님같이 되어 세상이 고통 가운데 거하게 되는 왕권을 이루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도는 욕망도 내려놓고, 오만함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겸손이어야 합니다. 요셉에게 필요한 것은 낮아짐의 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옷을 계속해서 갈아입히시며 왕도를 배우게 하십니다.
자랑하던 채색옷에서, 낮은 종의 옷으로 입히시고, 또 더 낮아질 곳이 없는 죄수복으로 갈아입히시고,
후에 바로 왕을 알현하는 복장으로 갈아입게 하시고, 마침내 총리의 의복으로 입혀주십니다. 이 총리의 의복을 입었을 때
그의 자세는 형제들을 위로하며 하나님의 주권 안에 거하는 겸손이었습니다.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근심하지 마소서……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 45:7-8).
요셉의 인생은 결코 한순간에 총리가 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옷들이 종합된 패키지입니다.
오늘 그 옛날의 부메랑과 패키지를 재소환하는 것은 우리를 향한 이해할 수 없는 다양한 연단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언젠가 함께 만나서 용서와 화해, 연합을 이루기 위함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하려는 것입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