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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갑주를 입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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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760회 작성일Date 22-10-04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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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에베소에 보낸 서신에는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이상이 가득합니다. 결론만 먼저 보아도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 6:10-11)는 권면을 통해 교회의 위력은 물론 십자가 용사로서의 사명도 드러납니다. 그런데 다른 서신에서는 전신갑주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강조합니다(롬 13:14; 갈 3:27). 저자가 다르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동일한 사람이 이곳에서는 이렇게, 저곳에서는 저렇게 말한다면 “두 가지 옷을 동시에 입어야 하나, 아니면 둘 중의 어느 것이든 한 가지만 입으면 되나?”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서신을 쓰고 있다면 결코 혼동이 아닐 것입니다. 먼저 전신갑주가 어떤 것으로 구성된 것인지를 살펴보면 그 진의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전신갑주는 6가지 종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그리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6가지는 단 하나로 통일됩니다. 예수님만이 진리이시며(요 14:6), 의이시기에 우리는 그의 의만을 구해야 하고(마 6:33), 예수님만이 이 세상의 평안의 복음이시며(행 10:36),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고(히 12:2),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시며(행 4:12), 성령으로 잉태되어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십니다(요 1:14). 그러므로 우리의 전신갑주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말은 곧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의 전신갑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만약 문자적인 말처럼 예수님이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옷이라면 신앙생활은 무척 쉬울 것입니다. 늘 그 옷을 옆에 두고 벗었다, 입었다를 반복하거나, 아니면 아예 평생을 벗지 않고 입고 있으면 저절로 능력이 생기고, 마귀의 간계를 다 이겨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투명 옷이 없듯이 그런 물질적인 옷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전신갑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는 말씀이 있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보내는 서신을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찬양(1:3-14)과 성도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1:15-23)로 시작하는데 그 기도 속에 그 길이 드러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힘(능력)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지를 알게 하시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고, 또한 모든 ‘통치, 권세, 능력, 주권’과 이 세상이나, 오는 세상에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예수님 안에 있는 능력은 세상의 모든 악한 권세와 능력을 격파하는 위력이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고, 교회인 우리는 그의 몸이라고 선언합니다. 이제 그 하나님의 능력이 머리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몸으로 흘러들어갈 때 교회는 가장 강력한 위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머리이신 예수님의 지시와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그 능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할 것이며, 세상풍조를 따라가는 불순종은 그 능력을 단절시키는 치명적인 독소가 될 것입니다. 그 능력이 몸된 교회인 우리 안에 충만하게 가득할 때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며,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눅 24:49)는 말씀의 성취인 것입니다. 전신갑주를 입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며 이는 곧 능력으로 입혀지는 것이기에 교회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