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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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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671회 작성일Date 22-07-23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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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육체에는 본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한 가지 예가 바로 육체의 허기를 알리는 배꼽시계일 것입니다. 위장에서 알리는 신호음으로 각 사람마다 그 소리에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어지간한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흔히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본능적인 배꼽시계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이 땅에서 떠나보낸 눈물의 이별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도 어김없이 그 역할을 계속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의 신호라 할 수 있는 것이 또 다른 사람에게는 수치스러우면서 심지어 저주스럽기까지 한 고통의 신호가 되기도 합니다. 박완서라는 작가는 25살의 꽃다운 아들을 먼저 보낸 아픔을 이야기하며 그런 극심한 애통과 절규 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 눌은밥을 먹고 있는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먹은 것을 토하고, 또 토하기도 했다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어김없이 돌아오는 본능적인 허기를 ‘파렴치한 생명력’이라고 하며 비록 염치를 잃은 생명력이지만 염치를 갖추기 위해서라도 얼마간 파렴치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산 자는 살아야 합니다. 배꼽시계의 도움을 받아 비록 파렴치한 생명력일지라도 유지해야 진정한 염치를 갖추는 길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염치는 육신의 생명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에 다다를 때 갖출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진의는 육체가 의미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이 살아나면 그 영으로 인해 죽을 육체까지도 살아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롬 8:11). 이는 배꼽시계가 더 이상 필요 없는 영원한 몸의 부활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럼 이 땅에서 우리 육신을 살리기 위해 본능적인 배꼽시계를 허락하셨다면 분명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위해 영적인 배꼽시계를 허락하셨다는 것을 확신케 합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영적인 허기 또한 수시로 찾아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허기를 어떻게 충족시켜 갈 것이냐는 다양한 방법이 추구될 것입니다. 육적인 허기를 달래기 위해 다양한 음식들이 취향 따라 선택을 기다리고 있듯이, 영적 허기에 대한 것도 역시 동일하게 다양한 길이 열려 있을 것을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허기는 반드시 누군가나, 무언가를 숭배하고, 섬겨야만 충족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을 때 이는 곧 예수님만이 그 영적 허기를 달랠 수 있는 유일한 분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향하여 니고데모처럼 찾아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마리아 여인처럼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가 기다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이 차별이 아니냐고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그러실리가 없습니다. 이미 영적인 배꼽시계가 작동하여 니고데모가 허기를 느끼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배려이며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찾아올 수 있는 적당한 거리에서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이 희망입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든지 이러한 선물과 배려를 받지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이 영적인 허기에 대한 신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하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배꼽시계의 신호를 따라 예수님께 나아왔다가 결국 다른 것으로 허기를 일시적으로 때우는 것에 만족하며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생에 대한 허기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온 무명의 부자관원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고, 종교적인 주장들과 규율들로 허기를 달래려는 유대교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는 나올 생각이 없고 물질, 명예, 권력 등 갖은 다양한 우상들을 만들어 놓고 섬기는 세상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길들은 결국 ‘파렴치한 생명력’에서 일보도 전진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적 배꼽시계가 보내는 신호는 예수님 안에서만 그 응답이 완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