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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잃어버린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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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044회 작성일Date 21-05-21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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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수나 암호가 일상화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기계화, 전자화된 세상은 우리를 고유한 이름으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숫자 몇 개와 영어 알파벳 그리고 특수 기호로 우리를 인식할 뿐입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점수, 직장에서는 실적과 연봉이라는 수치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한 사람의 인격이 담긴 이름보다는 수나 암호가 앞서는 사회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름이 단지 무의미한 단어가 아니라는 사실은 어느 누구나 깊이 인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특히 성경 속에서 이름은 단순히 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의 의미가 아니라 그 사람의 전 인격, 전 인생의 여정이 녹아있는 그 사람 자신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라는 이름이 ‘아다마’라는 ‘흙’이라는 뜻의 단어와 밀접히 연관되어 하나님을 잃어버릴 때 흙으로 왔다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속성을 은연중 드러냅니다. 그리고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됨으로 한 집안의 가장이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또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함으로 속이고 빼앗는 약탈자가 하나님 나라의 대표로 거듭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이름 속에는 한 사람을 정의할 수 있는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 있는 이름들이 연쇄적인 고리를 통해 연결될 때 그 이름들은 의미의 연속이 되어 개인이 가족으로, 가족이 부족으로, 부족이 민족으로, 민족이 세계로 확대되어 역사가 됩니다. 바로 이것을 우리는 족보요 계보라고 부르며, 이 속에서 존재의 의미와 과거, 현재, 미래를 잇는 소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는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중요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시작이면서 또한 그 안에 수많은 이름들의 의미와 그 의미의 연결로 인해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이 탄생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피조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하셨습니다. 그것은 그 존재의 의미를 일깨워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다른 피조물을 지으시고 아담에게 데려오셨다는 것은 곧 우리에게 이름 없는 다른 피조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할 수 있는 주권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를 하나님의 창조의 파트너로 불러주셨다는 놀라운 이상과 더불어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가꾸어 나갈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름 속에 부여되는 의미는 곧 그 존재의 미래를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중요한 이름을 잃어버릴 때 인간은 이미 파멸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고, 또 나아가서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모든 고리들이 일시에 끊어져 버리는 단절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시는 그 이름으로 인해 탄생한 민족인 이스라엘이 이름을 잃어버리기 시작합니다. 사사기의 끝에서는 그동안 언제나 누구의 아들이요 누구의 손자요라고 소개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름이 사라집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 동안을 지내매”(삿 19:1-2). 등장인물들이 모두 ‘어떤 레위 사람,’ ‘그 어떤 레위 사람의 이름 없는 첩,’ 그리고 ‘그 이름 없는 첩의 이름 없는 아버지’로 소개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동하는 이 이름 없는 레위인과 첩을 집으로 영접하는 사람도 단지 이름 없는 한 노인일 뿐입니다(삿 19:16).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창세기에서 이름이 한 민족의 창조와 탄생, 소명으로 연결되어 결론에 이르렀다면 이제 사사기의 결론에서 이름이 사라지는 현상은 곧 그 반대 현상인 소멸과 파멸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이름값을 하게 되며 희망 가득한 세상을 기대할 수 있다면, 사람이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할 때 이름의 가치를 상실하며 모든 것이 숫자로 평가되는 비인간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