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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헝거, 그레이트 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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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677회 작성일Date 18-06-02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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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 (burning)’ 이 2018년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 상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가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작이 되었다는 것은 버닝이 보여주는 이 시대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양극화 대립이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들의 공통적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 일 것입니다. 영화는 가진 자를 그레이트 헝거 (great-hunger) 라고 부르고 못 가진 자를 리틀 헝거 (little-hunger) 로 부릅니다. 이 말은 아프리카 춤에서 온 말인데, 우리식으로 하면 금 수저, 흙 수저와 비슷한 말입니다. 다만 우리나라 금 수저는 물질적 풍요만을 나타내지만, 아프리카의 그레이트 헝거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정신적 배고픔을 느끼는 철학적 의미가 더 해진 말입니다. 반면에 리틀 헝거는 물질적 배고픔을 말하는데, 그 정도가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자조 섞인 말로 하는  흙 수저와는 다른 생존의 위협 속에 살아가는 국제 난민들, 아프리카 기아들, 동남아의 빈곤층 등을 연상시키는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모두 헝거 (hunger, 배고픈 자) 이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주인공 종수(유아인 분), 혜미(전종서 분) 는 리틀 헝거로, 벤(스티븐 연 분)이 그레이트 헝거로 연기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종수가 벤을 살해하고 그의 부를 상징 하는 벤의 외제차에 불을 질러 버닝(burning) 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 불 속에서 벤에 대한 종수의 분노, 반항, 도전, 복수까지 모두 태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불 속에 자기 옷을 모두 벗어 던지므로 자기의 배경, 벗어지지 못하는 현실, 이 시대의 모순,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 다 태워 버리고 맙니다. 영화는 그렇게 마쳐졌지만 거리에서 만나는 젊은이들의 방황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 영화를 본 어른 관객으로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가진 자도 방황하고 못 가진 자도 방황하는 이상한 시대를 우리 어른들이 물려 준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아르바이트로 내일 없는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젊은이들, 남산 전망대의 유리에 반사되어 들어오는 작은 햇살만이 짧은 시간 방을 비춰 주는 작은 원룸,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팬터마임으로 그것을 먹는 시늉을 하면서 식욕을 채워야 하는 리틀 헝거의 몸부림이 바로 우리 자녀들이 살고 있는 이 시대이고 우리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살아가야 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라고 감독은 영화에서 드러내고 있는 듯합니다. 누가 이들의 아픔을 달래 줄 것인가? 가진 자는 가진 자 대로 영혼의 배고픔을 느끼고 못 가진 자는 현실의 배고픔을 호소하고 있다. 과연 누가 이들의 배고픔을 채울 것인가? 누군가 이 문제를 답해 주지 않는다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같이 리틀 헝거들은 그리이트 헝거를 향해 반란과 폭동을 일으키고 말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것이 또한 역사가 가르치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그 답은 모든 배고픈 자들이 다 먹고 배부를 수 있는 떡이 있어야 합니다. 그 떡을 예수님은 생명의 떡 이라고 하십니다. (요 6: 35) 이 떡은 리틀 헝거에게는 일용할 양식이요, 그레이트 헝거에게는 영혼의 만족이 됩니다. 예수님은 친히 이 떡이 되시고자 리틀 헝거로 사시면서 그레이트 헝거들의 고갈을 채워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젊은이들이 금 수저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흙 수저라 해도 생명의 떡이 있으면  금 수저를 먹일 수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은 영화를 통해서 시대의 문제는 던졌지만 그 답은 관객들이 찾으라고 여백을 남겨 놓았습니다. 답이 없는 영화, 이것이 국제 영화제의 수상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그 답을 성경 속에서 찾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나팔수 강 승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