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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향한 항변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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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325회 작성일Date 22-06-22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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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희망을 말하고, 그 희망을 더욱 굳게 부여잡을 때는 고통과 아픔, 좌절이 현재를 둘러싸고 있을 때입니다. 이것은 헨리 나우웬이 그의 책 『영적 발돋움(Reaching Out)』에서 한 말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탁 트인 들판에 대해서 말할 때는 어두운 숲에 있을 때이며, 감옥이 우리로 자유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고, 배고픔이 음식에 감사하도록 해주고, 전쟁이 우리에게 평화에 관한 말을 하게하며, 미래에 대한 이상은 현재의 고통에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그렇습니다. 희망은 이렇게 현재를 견딜 수 있는 힘을 제공해줍니다. 그러나 이런 실낱같은 희망조차 가질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무너져 버린 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욥이라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희망이라고는 한 터럭도 찾아볼 수 없는 절망이 가득한 삶의 현장인 욥기에 ‘희망’이라는 히브리어 단어인 ‘티끄바’가 성경의 어떤 책보다도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34번 나타나는데 욥기에서만 13번이나 나타나고 있습니다(욥 4:6; 5:16; 6:8; 7:6; 8:13; 11:18, 20; 14:7, 19; 17:15(2); 19:10; 27:8). 그러나 욥의 입에서 이 단어는 결코 긍정적으로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단지 자신의 상황을 더욱 처참하게 부각시키는 단어일 뿐입니다. 예를 들면 “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뻗어서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욥 14:7-9)라는 독백입니다. 이 말은 흡사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그루터기만 남은 나무만도 못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 위함이란 점에서 부정적입니다. 이렇게 밑동이 찍혀져 새 생명에 대한 아무 기대도 할 수 없이 다 죽어가는 그런 나무도 물이 주어지면 다시 움을 틔울 수 있기에 희망을 말할 수 있는데 자신은 어떤 희망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태를 바라보며 “나의 희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희망을 누가 보겠느냐 우리가 흙 속에서 쉴 때에는 희망이 스올의 문으로 내려갈 뿐이니라”(욥 17:15-16)고 하며 희망이 죽음의 세계 속에 묻혀버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욥의 절망에 찬 독백이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의 말은 결코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희망을 다 잃어버린 최악의 절망 속에서 쏟아내는 탄식일지라도 욥이 말한 그 독백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기도라는 것을 통해 그 증거를 역력히 살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도 안에는 최고의 희망을 염원하는 바램이 들어 있습니다. 욥은 결코 절망에 손을 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욥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그 순간까지 있는 힘을 다해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때로는 간곡한 호소로, 때로는 용감하게 항변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욥기 또한 욥이 겪었던 고통과 좌절, 절망을 그 결론으로 결코 내세우지 않습니다. 욥기 전체를 가로지르며 면면히 흘러가는 한 정신은 바로 희망의 역설입니다. 인간적인 모든 희망이 다 사라졌다는 그 선언이 진정한 희망에 대한 갈망이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다면 결코 하나님을 향하여 따지듯이 덤벼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거두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그 믿음의 끈이 계속되고 있기에 하나님을 향하여 “왜?”라는 질문을 쏟아 붓고 있는 것입니다. 절망이 가득한 곳에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희망의 미래로 나아가는 문이 있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욥과 같은 간절함으로 절망에 맞서서 오직 하나님의 응답을 끈질기게 기다리면 그 절망의 암흑 속으로 희망이라는 빛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다는 하나님을 향한 항변은 하나님만이 희망이라는 또 다른 신앙고백입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