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붙들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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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340회 작성일Date 22-04-23 17:54본문
부활이 없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도 헛것이며,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라는 바울 사도의 선언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존폐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고도 소중한 사건입니다(고전 15:14, 19). 이 부활의 날은 죄악으로 인한 죽음의 왕 노릇을 마침내 파기하시고 예수님이 생명의 주로 등극하시는 승리의 날입니다. 그러나 그 옛날 부활의 아침 그날은 축제의 날이 아니라 눈물과 충격의 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영혼이 떠나가신 날을 성경은 예비일이라고 합니다. 그날은 바로 안식일 전날로 안식일을 준비하고 예비하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했기에 예수님의 시신을 신속히 내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만이 장례를 치르며 무덤에 안치했습니다(요 19:38-42). 이를 안타깝게 여긴 것은 여인들이었고, 안식일이 끝나는 동이 터오면 무덤에 안치된 예수님의 시신을 위해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려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준비해 가져간 향품만 보아도 그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막 16:1; 눅 24:1).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확신했다면 향품은 불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향품은 예수님을 영구히 장사지낼 때나 필요한 물품이기에 죽은 자를 위한 것이지 부활의 주를 위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사람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여인들 중에서 특히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일이 아직 끝나지 않은 어둠 속에서 무덤으로 갔다고 합니다(요 20:1). 아마도 다른 여인들보다 먼저 도착했을 것이라 여겨지고, 이는 마리아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했는지를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덤 문이 열려있고, 시신마저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리운 스승의 시신만이라도 보기를 원했는데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되어 무덤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요 20:11). 이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과거에 대한 향수가 그녀를 눈물 흘리게 했고, 스승의 시신이라도 보려는 갈망을 갖게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가에서 그녀가 기대했던 것은 과거의 추억을 되살리는 예수님의 시신이었을 뿐, 미래적 희망은 결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으니 불가능한 일이기에 울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한 남자가 서 있고 동산지기인줄만 알았던 그 남자가 ‘마리아야’ 하고 부르는데 그 목소리가 자신이 그리워하던 스승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랍오니’(선생님)라는 호칭은 곧 과거의 향수를 붙잡으려는 마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나를 붙들지 말라”는 의문스런 명령을 내리십니다(요 20:17). 예수님의 시신만이라도 애타게 찾고 있던 여인에게 관계단절을 선언함이 아닌가 하는 서운함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 안에는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하여 주님과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이 깨달아야 할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랍오니’라는 호칭은 분명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고자 하셨던 미래의 희망이 상실된 호칭입니다. 그 희망은 이 명령 다음에 주어진 내용으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예수님의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로도, 또한 ‘예수님의 하나님’이 ‘너희 하나님’이 되는 세상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새롭게 정립된 완전한 세상입니다. 그 일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셨다가 다시 오셔야 성취됩니다. 부활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내주하실 때 과거의 ‘랍오니(선생님)’에서 현재와 미래의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되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정말 붙잡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과거의 추억이 아닌, 현재 살아계신 부활의 주님을 붙잡을 때 추억이 미래를 향한 소망과 소명이 됩니다.
김 재 구 목사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