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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로 걱정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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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320회 작성일Date 22-12-14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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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걱정도, 근심도 많은 곳입니다. “이 일이 안 되면 어떻게 하나, 저 일이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와 같은 압박감들이 저절로 밀려들어 오는 삶이라는 것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직장인이라면 지금 맡은 일이 잘 안될 때 다가올 질책과 책임소재에 대한 걱정이 큽니다. 크든, 작든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의 실패는 곧 사업의 성패를 좌우하고 함께하는 직원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자신의 가족에게 돌아갈 생활고를 염려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로 근심과 염려가 가득한 사람들에게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라는 말은 위로의 차원을 넘어 구원의 소리로 들릴 것이라 여겨집니다. 만약 그 음성이 모든 것을 책임져 줄 수 있는 그럴만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이보다 더한 구원의 메시지가 따로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이 말이 하나님께서 직접 혹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에 의해 주어졌다면 충분히 그런 위력이 있습니다. 그 실행이 보증된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니 희망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서 이 말은 안타깝게도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 죄에 빠진 다윗이라는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점에서 위로나 희망이 아닌, 비극의 조짐입니다. 다윗은 다른 이의 아내인 밧세바를 데려와 간음하고, 임신하자 이를 무마하려 결국 그 남편 우리아를 죽이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우리아를 죽이기 위해 요압에게 서신을 보내 우리아를 가장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돕지 말고 뒤로 물러가서 적에게 맞아죽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은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우리아가 전사한 후에 요압은 다윗에게 편지를 써 전령을 통해 보냅니다. 그 내용 인즉은 성문에 너무 가까이 접근하여 공격하는 바람에 왕의 부하 몇 사람이 죽고 우리아도 같이 죽었다는 내용입니다. 무고한 부하장수들의 희생과 충직한 우리아의 전사에 다윗은 담담히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가리지 않고 삼키는 것이니 힘을 내 성을 함락시키라”는 전갈을 보냅니다(삼하 11:25).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는 다윗의 말은 이 상황 속에서는 결코 위로도, 희망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 속뜻은 “나와 공범이 돼주어 고맙다”라는 의미로 들립니다. 이들이 잠시는 걱정을 보류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급류가 되어 밀어닥칠 심판을 받을 것을 예상케 합니다. 그 심각성은 이 말을 히브리어 본래의 의미로 번역할 때 드러납니다. 본래의 문자적인 뜻은 “이 일을 네 눈이 보기에 악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다윗이 “악하다, 악하지 않다”를 판단하는 주권자가 되어 있습니다. 이는 선과 악의 판단기준이 다윗 자신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이 사건의 결론에서는 전혀 다른 판단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눈에) 악하였더라”(삼하 11:27). 다윗은 “이 일을 네 눈이 보기에 악하게 여기지 말라”고 하나 분명히 “여호와의 눈에는 악하였다”라고 합니다. 사람이 맞을까요, 하나님이 맞으실까요? 차후의 사건을 살펴보면 진정한 주권자가 누구인지 드러납니다. 다윗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와 동일한 일로 말미암아 에덴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다윗도 결국 왕좌에서 밀려나고, 가나안 땅을 벗어나 요단을 건너 도망자의 신세로 추방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태초부터 선악의 판단 기준은 하나님이심을 또다시 우리 인생에게 선명하게 각인시키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눈에 악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 악하지 않아야 근심, 걱정에서 벗어나 진정한 위로와 희망 가운데 거하게 됨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