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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타는 교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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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353회 작성일Date 22-10-04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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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농가에는 집 옆에 외양간이 딸려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농사일에 소의 힘은 필수였기에 소 한 마리씩은 키우곤 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소여물을 만들기 위해 짚이나 풀을 잘게 써는 ‘작두’라는 기구도 외양간 옆에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농사에 소의 힘을 대체하는 기계화가 이루어지며 ‘작두’ 또한 그 쓸모를 다하며 사라지는 기구가 되었습니다. 그저 한약방에서 한약재를 썰기 위해 쓰는 작은 ‘작두’ 정도가 잔존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본래 의도된 기능과는 전혀 관계없이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작두’가 인기 있게 사용되는 장소가 있습니다. 바로 무속인이 굿을 하는 장소입니다. 영험하다고 하는 신내림을 받은 강신무 중에는 작두의 시퍼런 칼날을 하늘을 향하게 세워놓고 그 칼날 위에서 굿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통 ‘무당이 작두를 탄다’라고 합니다. 분명 과일도 깎을 수 있고, 천 조각은 물론 가죽까지도 손쉽게 잘라버릴 수 있는 칼날 위에 그냥 서 있는 정도가 아니라 땅에서 뛰놀 듯 그 위에서 맨발로 춤을 추며 굿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무속인이 굿을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모여들고, 전국 각지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찾아와 굿을 부탁합니다. 죽은 자의 영혼을 만나고 싶고, 자신의 삶에 붙은 불운을 떼내는 액땜을 하고 싶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떨치고 싶고, 혹은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영험하다고 하는 무속인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지만 아무것도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만났다고 하는 영혼과 함께 살 수도 없고, 액땜이 되었다는 보장이 없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은 그대로 남아 있고, 운명 또한 알 수 없습니다. 작두를 타는 것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은 세상에 어떤 변화도 없으며, 바른 변화를 이끌어 갈 수도 없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살아가야 할 바른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잘못 살아온 삶에 대한 질책이 없기에 반성이라는 것이 없고 단지 무속인의 화려한 퍼포먼스를 통해 가지고 온 문제도, 어려움도 해결되기를 바라는 욕망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삶의 어려운 문제가 있다 하면 굿으로 혹은 부적으로 액막음을 하면 되기에 손쉽게 해결점을 얻을 수 있기에 인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결코 이와 같은 존재들에게 삶의 길을 맡겨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선언하십니다: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신 18:10-11).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우실 선지자의 말을 들으라 하십니다(신 18:15). 선지자들의 가장 중요한 핵심 메시지는 ‘회개하라’입니다.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며,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좋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달라야 할 교회들이 안타깝게도 동일하게 작두를 탑니다. 교회의 예배가 화려한 공연이 되고, 수많은 프로그램들은 사람들의 입맛을 맞추며 ‘좋아요,’ ‘싫어요’로 질을 평가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이런 사람들의 평가에 현혹되면 하나님을 향한 중심이 아닌, 사람들을 위한 작두를 타게 됩니다. 교회가 가야 할 길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합니다(히 4:12). 우리 그리스도인은 좌우에 예리하게 날 선 말씀의 칼을 타는 사람들입니다. 먼저 목사가 좌우에 시퍼렇게 벼려진 말씀의 칼날 위에서 성령의 춤을 추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는 삶을 살아가며 성도들을 그 말씀의 칼날 위로 이끌어 함께 성령의 춤을 추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마음의 생각과 뜻이 바르게 섬으로 욕망의 열매가 아닌 성령의 열매가 아름답게 맺히는 예수님의 삶이 될 것입니다. 이제는 소에게도 쓸모없는 작두는 던져버리고, 말씀 타는 교회로 이 시대를 깨우기를 소망해 봅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