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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바탕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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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363회 작성일Date 22-08-12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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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흔히들 ‘보지 않고, 신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를 생각해 봅니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심지어는 들은 것도 없이 누군가를 신뢰하고 믿는다는 것은 한 마디로 무작정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의 신앙을 정의하는 믿음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에 관하여 아무것도 본 것이나, 들은 것이 없이 “믿는다”라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광신이고 맹신입니다. 성경의 그 어느 곳에도 그러한 신앙을 강요한 적이 없고, 하나님께서도 “그것이 믿음이다”라고 요구하신 적도 없으십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찾아오시는 하나님,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체험적인 신앙에 바탕을 둡니다. 과거의 체험이 현재의 믿음을 가능케 하며 또한 미래를 맡기는 신뢰를 가능케 합니다. 즉 현재의 믿음은 반드시 과거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 체험을 만들어주었습니까?”라고 질문하면 단연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죄악으로 가득한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애굽이라는 제국의 권력과 압제 속에 종살이하며 고통 가운데 신음하며 살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동일하신 하나님, 나아가 광야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 입을 것을 공급하시며 일용할 양식을 책임지심 또한 보여주셨습니다. 더 이상 죄의 굴레 속에서 불평등, 불공평, 불만족, 불안감 가운데 살지 않게 하시려고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생명을 내어주시고, 구원의 기쁨을 허락하신 십자가의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은 바로 이러한 실제의 사건들에 바탕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믿음은 곧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믿음은 과거의 실제 사건에 바탕을 둔 미래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미래적인 것으로만 투영시키는 것은 될지 안될지 모르는 도박처럼 불안함만 가중시킬 뿐입니다. 반드시 믿음은 사실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그럴 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라는 말의 진의가 드러납니다. ‘실상’이라는 단어는 ‘휘포스타시스’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 혹은 ‘그 기초가 확고한 것’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증거’는 ‘엘렝코스’로 ‘이미 확증되고, 검증 된 것’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결국 다른 말로는 ‘사실인 것’이라고 옮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실상과 증거’는 과거의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 분명합니다. 이 확고하고, 이미 검증된 과거의 사실이 ‘바라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미래적인 기대를 불안감이 아니라 신뢰함으로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미래적인 믿음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우리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사실들만을 활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우리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사건들을 통하여 그 믿음을 북돋아 주십니다. 공중 나는 새를 보게 하시고, 들에 핀 백합화를 보게 하십니다. 새들은 창조 이후로 지금까지 심지도, 거두지도,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음에도 지금도 하늘을 날며 우리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길을 걸으며 주변으로 피어 있는 들꽃들을 보면 고르고 골라 사 입은 우리의 옷보다도 더 아름답고, 수려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현존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의 간곡한 사랑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너희는 이것들보다 더 귀하지 아니하냐,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6:26, 30). 이 말씀이 사실로 다가온다면 우리 하늘 아버지의 염려를 기쁨으로 바꿔드리는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이 작은 믿음을 온전한 믿음으로 세워주시기 위해 과거에도 보여주셨고, 현재에도 계속해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 확실한 증거와 검증에 바탕을 둔 사실이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바라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을 사실로 믿고 오늘을 담대히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