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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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170회 작성일Date 23-05-06 14:41본문
모세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스스로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하려 할 때는 애굽인 한 명을 쳐 죽인 후에 이스라엘 백성 한 사람을 곤궁에서 건져줍니다.
그러나 그 일이 발각되었을 때에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광야로 도망하는 신세가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건져준 그 이스라엘 백성 한 사람도 애굽의 종살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힘이라는 것이 고작 이 정도 밖에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모세의 40세의 반란이었습니다.
그 유사한 예는 광야에서 예수님을 통해 펼쳐진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애초에 갖고 있는 본래의 능력인 그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는 고작해야 한 사람의 한 끼 식사밖에는 안 되며 그것도 한 순간의 공복을 채워주는 정도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 버리고 말 것입니다. 오병이어는 사람이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 보았자 결과는 그 정도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마 14:18)시는 예수님의 명령에 응답하여 그 손에 올려 드리면 상황은 완전히 역전됩니다.
이 보잘 것 없는 한 끼 식사 거리가 장정만 오천 명을 먹이는 대역사를 일으킵니다.
여인들과 아이들까지 합치면 만오천에서 이만 명까지는 족히 되는 숫자일 것입니다.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시는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들으면 광야로 도망가 아무것도 아님을 탄식하는 모세에게 하신 또 다른 말씀이 생각납니다.
80세가 된 모세, 광야에서 40년을 양치기로 떠돌며, 이제는 애굽 왕실의 물이 다 빠져버리고, 늙어버린 몸 밖에는 남은 것이 없는 모세입니다.
이 모세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의 대표자이며, 무능한 인생의 상징입니다.
애굽인을 치고 이스라엘 백성 한 사람을 호기롭게 구해낸 그 모세가 아닌,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노인 모세를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소명을 주십니다. “이제 가라 내가 너를 보내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10).
한 사람도 제대로 구해내지 못한 모세입니다. 과거의 그 일은 회상하기만 해도 수치스럽고, 낮 뜨거워지는 고통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 모세의 응답은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11)로 철저한 부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모세의 이 반응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마 14:17)라고
한 제자들의 반응과 동일할 것입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함에 있어서는 한 치의 다름도 없는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고 명령하셨듯이 과거 모세에게도 다른 표현이지만 동일한 의미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 모세의 늙어버린 몸이나, 보잘것없는 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는 결코 다를 바가 없는 인생의 무능함의 상징입니다.
유능하다고 큰소리 칠지라도 곧 소멸되어 버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존재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보잘 것 없지만 주님께서 그것을 가져오라 하실 때 몸과 마음을 다 내어드리면 세상 제국의 황제 앞에서도 담대하게 서서 주의 뜻을 이루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순종하는 백성들에게 회복의 말씀을 전하는 생명의 통로가 됩니다.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가져오라 하실 때 기꺼이 올려드리는 순종이 세계의 역사를 뒤바꾸는 대격변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기대하시는 것도 우리입니다. 보잘것없을수록 좋습니다. 나는 한 끼 식사거리도 안 됩니다. 그것이 더 좋습니다.
더 겸손하게 주님이 빚으시는 그 손길 따라 순종하며 생명을 살리고, 세우는 역할을 감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 재 구 목사
그러나 그 일이 발각되었을 때에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광야로 도망하는 신세가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건져준 그 이스라엘 백성 한 사람도 애굽의 종살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힘이라는 것이 고작 이 정도 밖에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모세의 40세의 반란이었습니다.
그 유사한 예는 광야에서 예수님을 통해 펼쳐진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애초에 갖고 있는 본래의 능력인 그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는 고작해야 한 사람의 한 끼 식사밖에는 안 되며 그것도 한 순간의 공복을 채워주는 정도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 버리고 말 것입니다. 오병이어는 사람이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 보았자 결과는 그 정도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마 14:18)시는 예수님의 명령에 응답하여 그 손에 올려 드리면 상황은 완전히 역전됩니다.
이 보잘 것 없는 한 끼 식사 거리가 장정만 오천 명을 먹이는 대역사를 일으킵니다.
여인들과 아이들까지 합치면 만오천에서 이만 명까지는 족히 되는 숫자일 것입니다.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시는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들으면 광야로 도망가 아무것도 아님을 탄식하는 모세에게 하신 또 다른 말씀이 생각납니다.
80세가 된 모세, 광야에서 40년을 양치기로 떠돌며, 이제는 애굽 왕실의 물이 다 빠져버리고, 늙어버린 몸 밖에는 남은 것이 없는 모세입니다.
이 모세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의 대표자이며, 무능한 인생의 상징입니다.
애굽인을 치고 이스라엘 백성 한 사람을 호기롭게 구해낸 그 모세가 아닌,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노인 모세를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소명을 주십니다. “이제 가라 내가 너를 보내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10).
한 사람도 제대로 구해내지 못한 모세입니다. 과거의 그 일은 회상하기만 해도 수치스럽고, 낮 뜨거워지는 고통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 모세의 응답은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11)로 철저한 부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모세의 이 반응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마 14:17)라고
한 제자들의 반응과 동일할 것입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함에 있어서는 한 치의 다름도 없는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고 명령하셨듯이 과거 모세에게도 다른 표현이지만 동일한 의미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 모세의 늙어버린 몸이나, 보잘것없는 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는 결코 다를 바가 없는 인생의 무능함의 상징입니다.
유능하다고 큰소리 칠지라도 곧 소멸되어 버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존재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보잘 것 없지만 주님께서 그것을 가져오라 하실 때 몸과 마음을 다 내어드리면 세상 제국의 황제 앞에서도 담대하게 서서 주의 뜻을 이루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순종하는 백성들에게 회복의 말씀을 전하는 생명의 통로가 됩니다.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가져오라 하실 때 기꺼이 올려드리는 순종이 세계의 역사를 뒤바꾸는 대격변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기대하시는 것도 우리입니다. 보잘것없을수록 좋습니다. 나는 한 끼 식사거리도 안 됩니다. 그것이 더 좋습니다.
더 겸손하게 주님이 빚으시는 그 손길 따라 순종하며 생명을 살리고, 세우는 역할을 감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