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주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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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233회 작성일Date 23-04-05 16:51본문
세상 속에서 사노라면 크고, 많고, 강하면 동료로 인정받기보다는 경쟁자로 여겨져 견제와 배척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긴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로 인한 결과는 심각한 사회현상이 되어 왔습니다.
유아기부터 겪게 되는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20대의 청년기가 되면 이미 탈진에 가까운 상태로 불안감이 급증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를 가속화 시키는 것이 ‘SNS’라는 점이 아이러니합니다.
‘SNS’는 ‘Social Network Service’의 약자로 ‘사회 관계망 서비스’로 해석되며, 디지털 시대에 비대면으로 사람들의 관계를 연결시켜 주는 목적으로 탄생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모든 것에는 명암이 있듯이 안타깝게도 어두운 부분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됩니다.
요즘의 신조어인 ‘카·페·인 우울증’이 바로 그것입니다. 커피와는 전혀 관계없이 SNS를 대표하는 ‘카카오톡,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들어진 용어입니다.
SNS를 통해 비교문화가 확대되며 때로 두려움과 패배감의 우울감으로, 때로 부러움과 질시의 경쟁심을 조성합니다.
두려움, 근심, 적개심이 버무려진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교를 통해 두려움과 우울감 그리고 경쟁 세상이 되었던 것은 결코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닙니다.
고대 세계에도 동일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애굽의 바로가 자신의 나라 안에서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된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라며 두려움과 근심을 내비친 것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출 1:9).
많고 강한 것이 동료가 아니라, 적으로 간주되어 공격의 대상이 되며 파괴해야 할 경쟁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가나안 땅으로 진군해 가는 광야 신세대에게도 동일하게 다가옵니다.
모압 땅을 지나가려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모압 왕 발락이 내뱉은 말은 바로와 결코 다르지 않다는 점에 세상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발락이 점술가 발람을 초청하며 이스라엘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니 와서 저주하라”는 것입니다(민 22:3, 6).
자신보다 많고, 강하면 그 힘으로 자신의 것을 빼앗아 갈테니 저주를 퍼부어 죽음으로 가게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바로 이런 저주에 사로잡힌 듯이 살아갑니다.
다른 이들이 가지고 있는 많고, 강한 것을 보고 두려움이 근심이 되고, 부러움이 적개심 가득한 경쟁심이 되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해결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발락의 저주를 발람의 입술을 통해 축복으로 바꾸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택하신 목적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저주를 퍼붓는 세상을 향해 많고, 강한 것은 빼앗고, 지배하고, 억압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함이라는 것을 세상에 삶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입술을 통해 언젠가 때가 되면 전적으로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을 또한 알려주십니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왕)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민 24:17).
마침내 이스라엘 땅에 한 별이 떠올랐고(마 2:2),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셔서(눅 2:11)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를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의 가르침은 “크고자 하느냐, 으뜸이 되고자하느냐, 반드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6-27)고 하십니다.
남들보다 우위에 서서 많고 강한 것을 휘두르면 저주가 되지만, 많고 강한 것이 낮아져 섬기면 저주가 축복이 됩니다.
고난주간은 그 낮아진 땅에서도 더 이상 낮아질 곳이 없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저주가 축복이 되듯이 그것을 감사하며, 그 삶을 따를 것을 다짐하는 날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김 재 구 목사
이러한 현상은 긴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로 인한 결과는 심각한 사회현상이 되어 왔습니다.
유아기부터 겪게 되는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20대의 청년기가 되면 이미 탈진에 가까운 상태로 불안감이 급증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를 가속화 시키는 것이 ‘SNS’라는 점이 아이러니합니다.
‘SNS’는 ‘Social Network Service’의 약자로 ‘사회 관계망 서비스’로 해석되며, 디지털 시대에 비대면으로 사람들의 관계를 연결시켜 주는 목적으로 탄생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모든 것에는 명암이 있듯이 안타깝게도 어두운 부분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됩니다.
요즘의 신조어인 ‘카·페·인 우울증’이 바로 그것입니다. 커피와는 전혀 관계없이 SNS를 대표하는 ‘카카오톡,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들어진 용어입니다.
SNS를 통해 비교문화가 확대되며 때로 두려움과 패배감의 우울감으로, 때로 부러움과 질시의 경쟁심을 조성합니다.
두려움, 근심, 적개심이 버무려진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교를 통해 두려움과 우울감 그리고 경쟁 세상이 되었던 것은 결코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닙니다.
고대 세계에도 동일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애굽의 바로가 자신의 나라 안에서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된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라며 두려움과 근심을 내비친 것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출 1:9).
많고 강한 것이 동료가 아니라, 적으로 간주되어 공격의 대상이 되며 파괴해야 할 경쟁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가나안 땅으로 진군해 가는 광야 신세대에게도 동일하게 다가옵니다.
모압 땅을 지나가려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모압 왕 발락이 내뱉은 말은 바로와 결코 다르지 않다는 점에 세상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발락이 점술가 발람을 초청하며 이스라엘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니 와서 저주하라”는 것입니다(민 22:3, 6).
자신보다 많고, 강하면 그 힘으로 자신의 것을 빼앗아 갈테니 저주를 퍼부어 죽음으로 가게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바로 이런 저주에 사로잡힌 듯이 살아갑니다.
다른 이들이 가지고 있는 많고, 강한 것을 보고 두려움이 근심이 되고, 부러움이 적개심 가득한 경쟁심이 되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해결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발락의 저주를 발람의 입술을 통해 축복으로 바꾸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택하신 목적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저주를 퍼붓는 세상을 향해 많고, 강한 것은 빼앗고, 지배하고, 억압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함이라는 것을 세상에 삶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입술을 통해 언젠가 때가 되면 전적으로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을 또한 알려주십니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왕)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민 24:17).
마침내 이스라엘 땅에 한 별이 떠올랐고(마 2:2),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셔서(눅 2:11)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를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의 가르침은 “크고자 하느냐, 으뜸이 되고자하느냐, 반드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6-27)고 하십니다.
남들보다 우위에 서서 많고 강한 것을 휘두르면 저주가 되지만, 많고 강한 것이 낮아져 섬기면 저주가 축복이 됩니다.
고난주간은 그 낮아진 땅에서도 더 이상 낮아질 곳이 없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저주가 축복이 되듯이 그것을 감사하며, 그 삶을 따를 것을 다짐하는 날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