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교회

남산교회
로그인
생명의 말씀

목회단상

꿈자리가 사나울 때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284회 작성일Date 23-03-25 11:24

본문

잠은 사람에게 필수 불가결한 것인지라 꿈이라는 것을 한 번도 꾸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도 꿈 이야기는 꽤 많이 나타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그리고 야곱도 꿈을 꾸었습니다.
이들의 꿈은 대부분 하나님이나 혹은 하나님의 사자들이 직접 나타나 말씀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기에 별다른 해석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이나 바로, 느브갓네살이 꾼 꿈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은사로 해석해야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꿈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계시의 한 방편이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유학시절 대학원 과정 때 꿈이란 주제에 관심이 있어서 ‘종교 사회학’이란 제목으로 개설된 꿈에 대한 강의를 한 학기 수강한 적이 있었습니다.
중심 내용은 꿈이 지금은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꿈이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 아니면 삶 속에서 부딪치는 어려움들로 인한 스트레스성 반추일 뿐인지는 꿈을 면밀히 분석하는 것을 통해 분별해야 함도 강조되었습니다.
즉, 모든 꿈이 다 하나님의 메시지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면밀한 분석의 시작은 꿈을 꾼 즉시 시간에 관계없이 일어나 노트에 적는 것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적으려 하면 이미 기억에서 사라지기에 즉각성이 요구되며, 그렇게 모든 꿈을 기록하여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과 연계를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꿈은 이런 사건과 저런 종류의 꿈은 저런 사건과 연계된다는 분석을 통해 꿈의 종류에 따라 일어날 사건을 유추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흥미롭긴 하지만 이미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할 길을 제시 받고 있기에 굳이 꿈까지 분석할 필요가 있나 싶어 얼마간 실행하다 멈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일 년에 한두 번 반복적으로 꾸는 같은 종류의 꿈이 있습니다. 삶의 한 과정에서 겪은 트라우마 같은 경험이 꿈이 되어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주 내용은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하며 벌어진 일입니다. 전혀 맞지 않는 전공, 그러나 바꿀 수 없는 상황, 수학으로 풀어야만 모든 것이 답이 되는 과목들은 흥미를 잃게 만들었고,
학교에 가는 것조차 버겁게 하였습니다. 대학에 가서야 그 길이 아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전공에 흥미가 없으니 결석을 자주하게 되고 그에 따라 성적은 바닥을 쳤습니다.
어떤 때는 몇 주 결석하고 수업시간에 조금 늦게 들어갔는데 모두 조용히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기에 왜 그런가 하였더니 중간고사를 치르고 있기도 했습니다.
물론 백지를 내고 나올 수밖에 없었지요. 가장 큰 문제는 졸업이었습니다.
낙제(F)한 과목들을 졸업 때까지 다 메울 수 있을까와 졸업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까는 늘 뇌리에 심각한 중압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졸업을 못하면 부모님께는 무어라 말하지라는 민망함이 컸습니다. 요행히 졸업은 하였지만 그때의 그 극심한 압박감은 일 년에 한두 번 꿈이 되어 돌아옵니다.
시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데 대학 마지막 학기 시험을 치러야 하는 꿈입니다. 한 과목이라도 실패하면 졸업을 못하는 그런 순간에 당황만 하고 있는 꿈입니다.
얼마전에도 이렇게 꿈자리가 사나운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이렇게 동일한 꿈을 반복적으로 꾸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 꿈을 꿀 때의 제 상황이 늘 동일했습니다. 맡은 일들에 대한 책임감과 중압감은 극도로 가중되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때였습니다.
이제야 답을 찾았습니다. 그 반복되는 꿈은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맡겨야 할 때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계속해서 심고 물을 주는 것이 소임일 뿐이며, 자라고 변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고 선을 행하되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것이 본분임을 깨달았습니다(고전 3:6; 갈 6:9).
 ‘변하고, 자라게 하는 것’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몫으로 돌려 드릴 때 ‘판단, 정죄, 심판’이 멈추고 묵묵히 자신의 소임에 충실할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