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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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370회 작성일Date 23-01-27 16:22본문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요즘은 별로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한 가지 들라고 한다면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이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크게 번성한다는 말’과 ‘하늘의 별과 같이’가 일견 그리 마음에 와 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상이 바빠져서 밤하늘을 볼 여유마저 없어져버린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밤하늘을 볼 이유마저 사라져 버린 상황이 더 큰 원인일 것입니다.
물론 사는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도시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진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늘의 별을 보는 것 자체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사람이 이렇게까지 하늘을 오염시켜 수도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을 점박이 정도로 보이게 만들어 버릴 줄은 상상조차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 되었고, 도시의 밤하늘은 그저 잿빛으로 물든 밋밋한 흑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감흥 없이 우리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시켜 단조롭게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도 그대로 읽어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황은 때로 밋밋하고 감흥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불문하고 미술이든, 음악이든, 건축이든, 기술이든 그 어떤 분야에서든 이 땅에 존재했던 모든 창조적인 작가들을 다 합하여도
하나님의 창조성의 파편만큼이라도 흉내낼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는 말씀만 보더라도 그 비교 불가능함은 족하리라 여겨집니다.
어리석음이 지혜보다 낫다는 말도 결코 성립될 수 없는 모순이지만 하나님과 어리석음이 함께 간다는 것은 더더구나 성립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반어법을 쓰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설명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현실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적용할 수조차 없을 만큼 구겨져 있을지라도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잃었던 감동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밤하늘의 별들을 그저 점박이로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아브라함에게 그 말씀을 주셨던 하나님의 마음을 아브라함의 감동으로 이해함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낮선 이방 땅에서 혈혈단신으로 엄습해 오는 밤의 두려움 속에 거하고 있는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틈새도 없이 밤하늘을 수놓은 그 수많은 별들을 가리키시며 너의 후손이 저 하늘의 별과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몸처럼 자식이 하나도 없는 자신의 삶과 수조차 감히 셀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의 밤하늘의 별들은 어느 누가 보아도 비교조차 불가능한데 하나님은 이 둘이 ‘같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모순 같고, 불가능해 보이는 말씀에 ‘여호와를 믿음’으로 응답합니다. 그 믿음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창조자 되심에 대한 믿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밋밋한 흑판 같은 그 검정 하늘에 말씀 한 마디로 그 많은 별들을 만들어 넣으신 창조자이심을 믿은 것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그 수많은 별들을 만들어 빛을 밝히시는 하나님은 어둠 속에 거하는 자신의 삶 속에 그와 같은 후손들을 능히 창조하실 하나님으로 믿은 것입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의
이 고백은 다윗의 믿음이 되기 전에 이미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창조자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볼 때 말씀 속에서 미래의 빛을 미리 보며 확신 가운데 거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김 재 구 목사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이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크게 번성한다는 말’과 ‘하늘의 별과 같이’가 일견 그리 마음에 와 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상이 바빠져서 밤하늘을 볼 여유마저 없어져버린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밤하늘을 볼 이유마저 사라져 버린 상황이 더 큰 원인일 것입니다.
물론 사는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도시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진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늘의 별을 보는 것 자체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사람이 이렇게까지 하늘을 오염시켜 수도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을 점박이 정도로 보이게 만들어 버릴 줄은 상상조차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 되었고, 도시의 밤하늘은 그저 잿빛으로 물든 밋밋한 흑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감흥 없이 우리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시켜 단조롭게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도 그대로 읽어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황은 때로 밋밋하고 감흥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불문하고 미술이든, 음악이든, 건축이든, 기술이든 그 어떤 분야에서든 이 땅에 존재했던 모든 창조적인 작가들을 다 합하여도
하나님의 창조성의 파편만큼이라도 흉내낼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는 말씀만 보더라도 그 비교 불가능함은 족하리라 여겨집니다.
어리석음이 지혜보다 낫다는 말도 결코 성립될 수 없는 모순이지만 하나님과 어리석음이 함께 간다는 것은 더더구나 성립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반어법을 쓰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설명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현실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적용할 수조차 없을 만큼 구겨져 있을지라도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잃었던 감동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밤하늘의 별들을 그저 점박이로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아브라함에게 그 말씀을 주셨던 하나님의 마음을 아브라함의 감동으로 이해함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낮선 이방 땅에서 혈혈단신으로 엄습해 오는 밤의 두려움 속에 거하고 있는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틈새도 없이 밤하늘을 수놓은 그 수많은 별들을 가리키시며 너의 후손이 저 하늘의 별과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몸처럼 자식이 하나도 없는 자신의 삶과 수조차 감히 셀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의 밤하늘의 별들은 어느 누가 보아도 비교조차 불가능한데 하나님은 이 둘이 ‘같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모순 같고, 불가능해 보이는 말씀에 ‘여호와를 믿음’으로 응답합니다. 그 믿음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창조자 되심에 대한 믿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밋밋한 흑판 같은 그 검정 하늘에 말씀 한 마디로 그 많은 별들을 만들어 넣으신 창조자이심을 믿은 것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그 수많은 별들을 만들어 빛을 밝히시는 하나님은 어둠 속에 거하는 자신의 삶 속에 그와 같은 후손들을 능히 창조하실 하나님으로 믿은 것입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의
이 고백은 다윗의 믿음이 되기 전에 이미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창조자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볼 때 말씀 속에서 미래의 빛을 미리 보며 확신 가운데 거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