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팔라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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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341회 작성일Date 22-12-16 16:48본문
중앙 아프리카와 남부 아프리카의 사바나 지역에는 ‘임팔라’라고 하는 소과의 빠른 움직임이 특징인 영양 종류가 서식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 이상은 물을 마셔야하기에 주로 물가에 큰 무리를 지어 살아갑니다.
이 임팔라는 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징으로 유명한데 그것은 다름 아닌 높이뛰기와 멀리뛰기의 재능입니다.
놀라거나 위기가 닥치면 높이는 3m정도, 거리는 9m정도를 뛸 수 있다 하니 올림픽에 나가면 경쟁상대가 없는 당연한 금메달감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높이가 1m도 채 안 되는 90cm 정도의 담으로 둘러싸인 동물원에 갇혀서 당연한 듯 살아가는 모습은 이상스럽기까지 합니다.
이미 그 이상을 뛸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그 안에 갇혀서 만족하며 지내는 것입니다.
물론 풀을 찾아 이동할 필요도 없고, 물을 찾아서 헤맬 필요도 없으며, 사나운 맹수들로부터도 안전이 보장되니 만족하지 못할 이유가 없기는 합니다.
단지 한 가지 광활한 대지 위에서 맘껏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그 고유의 자유를 잃은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포기한 대가를 이미 충분히 보상받는 듯하니 그 좁은 공간에서의 자유도 과히 불평할 것은 없을만 합니다.
삶의 안전과 생계의 보장은 자유롭게 뛰고, 달리며 살아가는 삶과 맞바꿀 만한 매력이 충분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렇게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임팔라가 그 낮은 담을 넘지 않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임팔라는 자신이 높이 뛰거나, 멀리 뛰기를 할 때 착지점이 정확하게 보이지 않으면 절대 뛰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신이 옮겨가는 곳의 안전성이 확보되어야만 높이든, 멀리든 뛰기를 시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임팔라가 비록 90cm 정도밖에는 안 될지라도 담장 너머를 전혀 볼 수 없는 생 울타리나 불투명 울타리에 갇혀 있을 때 뛰기를 시도하지 않는 이유였던 것입니다.
이런 야생동물의 특징을 보며 믿음을 돌아보게 됩니다.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서 ‘믿음’이란 단어는 ‘보지 않고’를 전제할 때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갈 장소, 즉 도착지를 알지 못하고 출발한 것(창 12:1)이 이스라엘의 시작이며,
약속의 성취가 더딤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이 그의 의로 여겨졌다(창 15:6)는 점에서 믿음이 하나님의 백성의 전형적인 특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출애굽 세대는 10가지 재앙 사건을 목격하고, 홍해가 갈라짐과 광야에서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눈으로 보고, 경험함으로 믿음이 생겼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세대들은 그 사건들을 들음으로 믿어야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께서 어느 특정 세대와 사람들에게 확증을 주시는 것 또한 들음의 믿음을 세우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직접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눈으로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지고 확신케 된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도들과 제자들이 있는가하면(요일 1:1-2)
그 이후의 모든 사람들은 귀로 듣고 마음으로 믿는 세대가 됩니다. 여기서 믿음의 대상, 즉 우리 그리스도인의 착지점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세상에 흩어져 극심한 고난 가운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베드로의 권면이 그 지점을 잘 드러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은 보지 못하였음에도 믿음의 결국인 예수님께로 착지점을 정하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신앙여정 속에는 진정한 착지점을 향하여 도약하기 위해 현재 딛고 있는 디딤돌인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선택과 결정의 시간이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값진 진주와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만이 믿음으로 현재의 디딤돌을 박차고 예수님만을 영원한 착지점으로 삼아 과감하게 뛰기를 시도할 것입니다.
김 재 구 목사
하루에 한 번 이상은 물을 마셔야하기에 주로 물가에 큰 무리를 지어 살아갑니다.
이 임팔라는 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징으로 유명한데 그것은 다름 아닌 높이뛰기와 멀리뛰기의 재능입니다.
놀라거나 위기가 닥치면 높이는 3m정도, 거리는 9m정도를 뛸 수 있다 하니 올림픽에 나가면 경쟁상대가 없는 당연한 금메달감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높이가 1m도 채 안 되는 90cm 정도의 담으로 둘러싸인 동물원에 갇혀서 당연한 듯 살아가는 모습은 이상스럽기까지 합니다.
이미 그 이상을 뛸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그 안에 갇혀서 만족하며 지내는 것입니다.
물론 풀을 찾아 이동할 필요도 없고, 물을 찾아서 헤맬 필요도 없으며, 사나운 맹수들로부터도 안전이 보장되니 만족하지 못할 이유가 없기는 합니다.
단지 한 가지 광활한 대지 위에서 맘껏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그 고유의 자유를 잃은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포기한 대가를 이미 충분히 보상받는 듯하니 그 좁은 공간에서의 자유도 과히 불평할 것은 없을만 합니다.
삶의 안전과 생계의 보장은 자유롭게 뛰고, 달리며 살아가는 삶과 맞바꿀 만한 매력이 충분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렇게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임팔라가 그 낮은 담을 넘지 않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임팔라는 자신이 높이 뛰거나, 멀리 뛰기를 할 때 착지점이 정확하게 보이지 않으면 절대 뛰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신이 옮겨가는 곳의 안전성이 확보되어야만 높이든, 멀리든 뛰기를 시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임팔라가 비록 90cm 정도밖에는 안 될지라도 담장 너머를 전혀 볼 수 없는 생 울타리나 불투명 울타리에 갇혀 있을 때 뛰기를 시도하지 않는 이유였던 것입니다.
이런 야생동물의 특징을 보며 믿음을 돌아보게 됩니다.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서 ‘믿음’이란 단어는 ‘보지 않고’를 전제할 때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갈 장소, 즉 도착지를 알지 못하고 출발한 것(창 12:1)이 이스라엘의 시작이며,
약속의 성취가 더딤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이 그의 의로 여겨졌다(창 15:6)는 점에서 믿음이 하나님의 백성의 전형적인 특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출애굽 세대는 10가지 재앙 사건을 목격하고, 홍해가 갈라짐과 광야에서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눈으로 보고, 경험함으로 믿음이 생겼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세대들은 그 사건들을 들음으로 믿어야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께서 어느 특정 세대와 사람들에게 확증을 주시는 것 또한 들음의 믿음을 세우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직접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눈으로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지고 확신케 된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도들과 제자들이 있는가하면(요일 1:1-2)
그 이후의 모든 사람들은 귀로 듣고 마음으로 믿는 세대가 됩니다. 여기서 믿음의 대상, 즉 우리 그리스도인의 착지점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세상에 흩어져 극심한 고난 가운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베드로의 권면이 그 지점을 잘 드러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은 보지 못하였음에도 믿음의 결국인 예수님께로 착지점을 정하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신앙여정 속에는 진정한 착지점을 향하여 도약하기 위해 현재 딛고 있는 디딤돌인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선택과 결정의 시간이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값진 진주와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만이 믿음으로 현재의 디딤돌을 박차고 예수님만을 영원한 착지점으로 삼아 과감하게 뛰기를 시도할 것입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