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히 피조물의 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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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232회 작성일Date 22-12-14 11:03본문
이 세상에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 만물들이 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것입니다.
때때로 ‘비, 바람, 햇빛’과 같은 창조된 피조물인 자연의 몇몇 요소들이 그 도를 지나쳐 정해진 한계의 울타리를 깨고
극도의 파괴를 일삼는 듯이 보이는 경우가 발생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늘 다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감으로 그 모두가 하나님의 통제 안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자연의 요소 중에서 고대로부터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정복할 수 없는 거대한 물의 집합체인 바다라는 존재는
인간에게 경이와 동경의 대상이면서도 또한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바다가 보여주는 고요함, 거대함 그리고 그 풍요로움은 인간 삶을 고양시켜주는 역할을 해주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사납게 포효하는 격동의 바다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정복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사납고 위협적인 존재로도 다가옵니다.
나아가서는 전형적인 악의 모형으로 심지어는 가장 강대한 신적인 모습으로 고대 근동에서는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같은 배경 속에서 살아갔던 이스라엘의 경전인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그 거친 바다를 통제 불가능한 신적인 존재로 인정하는 부분은 없습니다.
바다가 때로 위협적이며 인간적인 통제가 불가능하게 보일지라도 결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경계를 넘어가지 못합니다.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렘 5:22).
이처럼 아무리 거세게 포효하는 바다라도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모래라는 경계선을 결코 넘어가지 않는 다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냅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누구보다도 깊이 있게 통찰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두려움의 상징인 바다를 포함한 그 어떠한 피조물도 정해진 한계 안에서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나간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레미야가 전하고자 하는 선포의 결론은 아닙니다.
그는 바다를 비롯하며 자연 만물이 지켜나가는 이러한 철저한 창조의 질서를 겁 없이 벗어나는 또 다른 무엇과 대조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피조물들 중에 유독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되었고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특권을 부여받은 인간에 대한 신랄한 고발을 하기 위함입니다.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인간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존재는 어이없게도 자신의 피조성을 망각하고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한계를 겁 없이 넘나들면서도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 배반자요, 반역자들이라는 것입니다(렘 5:23-24).
이것은 자신의 위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의 삶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망각한 때문임에 틀림없습니다.
바다가 모래라는 도구를 통해 자신의 피조성을 긍정하고 행동의 한계를 깨달았다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삶의 법이라는 도구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기뻐하고 그를 통해 행동의 반경을 정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법이 율법이든, 사랑이든 그것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할 때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창조물들 중에서 태초에 정해주신 그 창조 질서의 한계를 넘어가는
유일한 피조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피조물로서의 위치를 망각한 그러한 사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자의 대리인은 될 수 있지만 그러나 결단코 대체자는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바로 사랑 많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깊이 있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피조성을 긍정하고 기뻐하며 정해진 한계를 인정하고 이해할 때 우리는 창조주에게 모든 주권을 돌려드리는 피조물의 위치에로 겸손히 물러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이 세상은 질서 가운데 그 아름다운 운행을 계속할 것입니다.
김 재 구 목사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 만물들이 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것입니다.
때때로 ‘비, 바람, 햇빛’과 같은 창조된 피조물인 자연의 몇몇 요소들이 그 도를 지나쳐 정해진 한계의 울타리를 깨고
극도의 파괴를 일삼는 듯이 보이는 경우가 발생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늘 다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감으로 그 모두가 하나님의 통제 안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자연의 요소 중에서 고대로부터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정복할 수 없는 거대한 물의 집합체인 바다라는 존재는
인간에게 경이와 동경의 대상이면서도 또한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바다가 보여주는 고요함, 거대함 그리고 그 풍요로움은 인간 삶을 고양시켜주는 역할을 해주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사납게 포효하는 격동의 바다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정복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사납고 위협적인 존재로도 다가옵니다.
나아가서는 전형적인 악의 모형으로 심지어는 가장 강대한 신적인 모습으로 고대 근동에서는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같은 배경 속에서 살아갔던 이스라엘의 경전인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그 거친 바다를 통제 불가능한 신적인 존재로 인정하는 부분은 없습니다.
바다가 때로 위협적이며 인간적인 통제가 불가능하게 보일지라도 결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경계를 넘어가지 못합니다.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렘 5:22).
이처럼 아무리 거세게 포효하는 바다라도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모래라는 경계선을 결코 넘어가지 않는 다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냅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누구보다도 깊이 있게 통찰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두려움의 상징인 바다를 포함한 그 어떠한 피조물도 정해진 한계 안에서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나간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레미야가 전하고자 하는 선포의 결론은 아닙니다.
그는 바다를 비롯하며 자연 만물이 지켜나가는 이러한 철저한 창조의 질서를 겁 없이 벗어나는 또 다른 무엇과 대조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피조물들 중에 유독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되었고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특권을 부여받은 인간에 대한 신랄한 고발을 하기 위함입니다.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인간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존재는 어이없게도 자신의 피조성을 망각하고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한계를 겁 없이 넘나들면서도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 배반자요, 반역자들이라는 것입니다(렘 5:23-24).
이것은 자신의 위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의 삶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망각한 때문임에 틀림없습니다.
바다가 모래라는 도구를 통해 자신의 피조성을 긍정하고 행동의 한계를 깨달았다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삶의 법이라는 도구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기뻐하고 그를 통해 행동의 반경을 정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법이 율법이든, 사랑이든 그것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할 때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창조물들 중에서 태초에 정해주신 그 창조 질서의 한계를 넘어가는
유일한 피조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피조물로서의 위치를 망각한 그러한 사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자의 대리인은 될 수 있지만 그러나 결단코 대체자는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바로 사랑 많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깊이 있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피조성을 긍정하고 기뻐하며 정해진 한계를 인정하고 이해할 때 우리는 창조주에게 모든 주권을 돌려드리는 피조물의 위치에로 겸손히 물러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이 세상은 질서 가운데 그 아름다운 운행을 계속할 것입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