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을 어리석은 것으로 만드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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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046회 작성일Date 23-08-19 15:42본문
사탄이 저지른 가장 치명적인 실책은 무엇일까요?
사탄의 왕국에 흠집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복되는 길로 가는 지름길임에도 그것을 허용하고, 방조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만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사탄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의 왕국을 철저하게 분쇄하여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할 것을 알았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막으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작전과 전략이 예수님께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는 것이 사탄의 실패의 원인이었습니다.
사탄은 이 땅에 존재하는 인생이란 육신적으로 최상의 삶을 살 수 있는 미끼만 던져주면 만족하여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내 던질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예수님을 저평가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인생들이 그와 같은 것에 넘어지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대일로 달라붙어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것,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자신에게 절 한 번 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주겠다는 유혹을 들이밀며 메시아를 속물로 전락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것들을 무시하시지는 않지만 이 모든 것들 위의 삶이 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며,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아야 하며,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주가 되시는 삶을 통해 물질도, 부귀도, 천하의 영광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바르고 유일한 길을 보이신 것입니다.
사탄이 보기 좋게 패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사탄이 아니지요.
약간 당혹스럽긴 했겠지만 만약 첫 번째 방법이 통하지 않으면 다음 작전이 있기에 저의기 안심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 다음은 한 사람을 무너뜨리기에는 꽤나 효과적인 방식으로 예수님의 주변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고립시키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 사랑으로 서로 하나 되는 공동체를 이루기를 소망하십니다.
사탄도 사람은 이렇게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공동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공동체 속에서 혼자만 다른 의견을 가질 때의 그 고립감과 외로움, 때로는 공포감이 무엇인지를 익히 짐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는 수제자인 베드로의 약한 부분을 건드려 예수님이 그 길을 결단코 가서는 안 된다고 붙잡고 늘어지게 만들어 멈춰 세우려 합니다.
그 다음은 제자들을 동원하여 “누가 크냐?”라는 싸움박질을 하게 만들어 십자가의 길을 아무도 원치 않는다는 것을 폭로하여 좌절케 만들려 합니다.
그리고는 가장 사랑받던 제자였던 요한과 그 형제 야고보까지 나아와 예수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청탁을 하게 함으로
십자가는 제자들 중의 어느 누구의 관심사도 아님을 드러내 절망감에 빠지게 하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히 사람의 일에서 하나님의 일로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과 섬기기 위해 오셨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음을 굽히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높아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낮아져 종이 되는 곳에 있다는 것을 거듭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가르치신대로 가장 낮은 십자가로 가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그 뜻을 전심을 다해 이루려는 존재 앞에서는 사탄은 가장 어리석은 것이 됩니다.
김재구 목사
사탄의 왕국에 흠집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복되는 길로 가는 지름길임에도 그것을 허용하고, 방조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만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사탄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의 왕국을 철저하게 분쇄하여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할 것을 알았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막으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작전과 전략이 예수님께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는 것이 사탄의 실패의 원인이었습니다.
사탄은 이 땅에 존재하는 인생이란 육신적으로 최상의 삶을 살 수 있는 미끼만 던져주면 만족하여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내 던질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예수님을 저평가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인생들이 그와 같은 것에 넘어지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대일로 달라붙어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것,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자신에게 절 한 번 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주겠다는 유혹을 들이밀며 메시아를 속물로 전락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것들을 무시하시지는 않지만 이 모든 것들 위의 삶이 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며,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아야 하며,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주가 되시는 삶을 통해 물질도, 부귀도, 천하의 영광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바르고 유일한 길을 보이신 것입니다.
사탄이 보기 좋게 패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사탄이 아니지요.
약간 당혹스럽긴 했겠지만 만약 첫 번째 방법이 통하지 않으면 다음 작전이 있기에 저의기 안심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 다음은 한 사람을 무너뜨리기에는 꽤나 효과적인 방식으로 예수님의 주변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고립시키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 사랑으로 서로 하나 되는 공동체를 이루기를 소망하십니다.
사탄도 사람은 이렇게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공동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공동체 속에서 혼자만 다른 의견을 가질 때의 그 고립감과 외로움, 때로는 공포감이 무엇인지를 익히 짐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는 수제자인 베드로의 약한 부분을 건드려 예수님이 그 길을 결단코 가서는 안 된다고 붙잡고 늘어지게 만들어 멈춰 세우려 합니다.
그 다음은 제자들을 동원하여 “누가 크냐?”라는 싸움박질을 하게 만들어 십자가의 길을 아무도 원치 않는다는 것을 폭로하여 좌절케 만들려 합니다.
그리고는 가장 사랑받던 제자였던 요한과 그 형제 야고보까지 나아와 예수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청탁을 하게 함으로
십자가는 제자들 중의 어느 누구의 관심사도 아님을 드러내 절망감에 빠지게 하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히 사람의 일에서 하나님의 일로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과 섬기기 위해 오셨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음을 굽히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높아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낮아져 종이 되는 곳에 있다는 것을 거듭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가르치신대로 가장 낮은 십자가로 가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그 뜻을 전심을 다해 이루려는 존재 앞에서는 사탄은 가장 어리석은 것이 됩니다.
김재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