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의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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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092회 작성일Date 23-07-08 13:05본문
바울이 교회들에게 보낸 서신들을 살펴보면 의외로 사탄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꽤나 많이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곧 교회의 문제들이 사탄의 교묘한 농간 속에서 벌어지는 것임을 짐작케 합니다.
바울은 사탄의 계책을 알기에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는 목적으로 서신을 보낸다고 합니다(고후 2:11).
왜냐하면 사탄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 수 있고, 그 일꾼들도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대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고후 11:14-15).
때로 사탄이 직, 간접적으로 사역의 길을 막기도 하고(살전 2:18), 사탄의 활동을 따라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이 나타남으로(살후 2:9) 안타까이 사탄에게 돌아간 자도 있다고 합니다(딤전 5:15).
그러한 사탄의 전략 중의 한 가지가 로마서에 등장하고 있는데 바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사이에서의 다툼입니다.
민족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며, 살아왔던 방식이 다릅니다. 종교적인 열심을 가지고 행해왔던 방식이 다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남자 아이들이 태어나면 당연하게 8일 만에 할례를 행합니다.
또한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자연스레 안식일을 지키고, 절기들을 지키며, 먹는 것에 있어서도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가려 먹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깨끗케 하셨음으로 할례나 무할례나, 어떤 날들이나, 어떤 먹거리나 정결과 부정의 구별이 없어졌음에도 살아왔던 종교적인 방식을 고수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본질이라고 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신앙을 더 정결하게 가져가고자 하는 의미이기에 해될 것은 없습니다.
단기간 동안 음식을 끊는 금식을 통해서도 신앙의 순수함을 추구할 수 있듯이, 일상의 음식과 날을 구별하는 것도 신앙에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옳다, 그르다 하며 공동체가 서로 논쟁을 벌이며, 다툼을 벌일 때입니다.
사탄은 이렇게 틀리지 않은, 다른 방식을 이용하여 성도들이 서로 다투게 만듭니다.
자신의 방식이 서로 옳다고 믿게 만들어 공동체를 다투게 하고, 이간시킵니다.
우리가 분명히 상기해야 할 것은 공동체 속에서 서로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은 결코 하나님에게서 나온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의견과 생각, 주장에 대하여 목소리가 격앙될 때, 그 때는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사람의 자기 의와 자기주장일 수 있습니다.
사탄의 전략 중의 치명적인 것 한 가지가 바로 이렇게 성도들이 서로 옳다고 믿게 만들어 부딪치게 하는 것입니다.
양쪽이 틀리지 않고, 방법이 다를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이 목소리를 높이며 자신의 옳음을 피력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무시한다면 분명하게 인지해야 할 것은 그 근본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과로 평가하시는 분이 아니라, 과정을 보십니다. 과정이 올바를 때는 결과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평강이 임합니다.
그러나 선한 결과를 이룬다는 명목으로 과정이 거칠어지면 그것은 이미 사탄이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공동체를 향해 기도합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롬 16:20).
그렇습니다. 바울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교회의 평강이며, 그 평강은 곧 주 예수의 은혜가 공동체 안에 있을 때 가능해집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의 예를 들며 비록 자신의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가 활동하고 있으나 그것마저도 하나님께서 교만하지 않고 은혜 안에 머물게 하시려는 것이기에
사탄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읽는 도구로 삼습니다(고후 12:7).
이러한 믿음의 눈이 열려 있으면 사탄의 전략은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더욱 고양시키는 도구일 뿐입니다.
설사 사탄의 가시가 공동체에 꽂혀도 그것이 누군가를 공격하는 빌미가 아니라 은혜를 기억케 하는 통로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 재 구 목사
이는 곧 교회의 문제들이 사탄의 교묘한 농간 속에서 벌어지는 것임을 짐작케 합니다.
바울은 사탄의 계책을 알기에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는 목적으로 서신을 보낸다고 합니다(고후 2:11).
왜냐하면 사탄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 수 있고, 그 일꾼들도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대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고후 11:14-15).
때로 사탄이 직, 간접적으로 사역의 길을 막기도 하고(살전 2:18), 사탄의 활동을 따라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이 나타남으로(살후 2:9) 안타까이 사탄에게 돌아간 자도 있다고 합니다(딤전 5:15).
그러한 사탄의 전략 중의 한 가지가 로마서에 등장하고 있는데 바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사이에서의 다툼입니다.
민족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며, 살아왔던 방식이 다릅니다. 종교적인 열심을 가지고 행해왔던 방식이 다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남자 아이들이 태어나면 당연하게 8일 만에 할례를 행합니다.
또한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자연스레 안식일을 지키고, 절기들을 지키며, 먹는 것에 있어서도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가려 먹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깨끗케 하셨음으로 할례나 무할례나, 어떤 날들이나, 어떤 먹거리나 정결과 부정의 구별이 없어졌음에도 살아왔던 종교적인 방식을 고수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본질이라고 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신앙을 더 정결하게 가져가고자 하는 의미이기에 해될 것은 없습니다.
단기간 동안 음식을 끊는 금식을 통해서도 신앙의 순수함을 추구할 수 있듯이, 일상의 음식과 날을 구별하는 것도 신앙에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옳다, 그르다 하며 공동체가 서로 논쟁을 벌이며, 다툼을 벌일 때입니다.
사탄은 이렇게 틀리지 않은, 다른 방식을 이용하여 성도들이 서로 다투게 만듭니다.
자신의 방식이 서로 옳다고 믿게 만들어 공동체를 다투게 하고, 이간시킵니다.
우리가 분명히 상기해야 할 것은 공동체 속에서 서로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은 결코 하나님에게서 나온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의견과 생각, 주장에 대하여 목소리가 격앙될 때, 그 때는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사람의 자기 의와 자기주장일 수 있습니다.
사탄의 전략 중의 치명적인 것 한 가지가 바로 이렇게 성도들이 서로 옳다고 믿게 만들어 부딪치게 하는 것입니다.
양쪽이 틀리지 않고, 방법이 다를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이 목소리를 높이며 자신의 옳음을 피력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무시한다면 분명하게 인지해야 할 것은 그 근본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과로 평가하시는 분이 아니라, 과정을 보십니다. 과정이 올바를 때는 결과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평강이 임합니다.
그러나 선한 결과를 이룬다는 명목으로 과정이 거칠어지면 그것은 이미 사탄이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공동체를 향해 기도합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롬 16:20).
그렇습니다. 바울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교회의 평강이며, 그 평강은 곧 주 예수의 은혜가 공동체 안에 있을 때 가능해집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의 예를 들며 비록 자신의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가 활동하고 있으나 그것마저도 하나님께서 교만하지 않고 은혜 안에 머물게 하시려는 것이기에
사탄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읽는 도구로 삼습니다(고후 12:7).
이러한 믿음의 눈이 열려 있으면 사탄의 전략은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더욱 고양시키는 도구일 뿐입니다.
설사 사탄의 가시가 공동체에 꽂혀도 그것이 누군가를 공격하는 빌미가 아니라 은혜를 기억케 하는 통로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