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접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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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117회 작성일Date 23-06-09 15:05본문
‘영접’이라는 단어는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을 맞이할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꽤 격이 있는 단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격을 넘어서 운명을 가름 짖는 행위이기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또한 영원한 운명의 갈림길이기에 중요도로 치면 비길 것이 없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례 요한과 바울을 가르는 분기점이 되기도 합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에 알리는 전령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메시아의 존재와 정체를 드러내는 사명이니 그 영광은 어디에다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특히 그 메시아가 세상을 구원할 하나님의 현존, 그 자체라고 한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일어남이 없다”(마 11:11)는 극찬으로 요약됩니다.
구약시대를 돌아보면 큰 자라고 할 만한 대단한 인물들이 여럿 떠오릅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엘리야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과 기적이 이들을 통해 펼쳐진 것을 생각하면 이런 인물들에 비하여 세례 요한이 한 일이라고는 회개의 세례밖에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례 요한은 새 시대의 전령으로서 이 모든 인물들에 비해 가장 큰 자라는 칭호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 칭호는 세례 요한을 높이려는 의도가 아닌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정도로 가치 있는 존재인가를 드러내시려는 의도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전에 나타나 세상에 소개하는 그 직분도 대단하지만, 예수님 이후에 주를 증거하는 그 직분이 훨씬 더 소중하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일어남이 없다”에 연속하여 ‘그러나’로 반전되는 말씀을 통해서 파악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마 11:11).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목적지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한복음은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바로 그 위상에 걸맞게 맞아들여 접대한다는 의미의 ‘영접’에 그 답이 들어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을 소개하는 역할로서의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여 증거 하는 자로서의 바울의 역할의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소개하였으나 영접까지는 이르지 않았고, 비록 박해하였으나 영접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현저한 차이를 만들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척도로 보자면 세례 요한은 삶에서 어떤 흠도 잡을 것이 없습니다.
철저한 금욕으로 광야에서 세상의 방식을 끊고 회개를 선포하며 주의 길을 예비하였고, 주를 세상에 소개하였습니다.
그에 비하면 바울은 교회를 박해하며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울도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까지는 철저하게 구약의 인물이었습니다.
율법에 정통하고,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며,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만 발견되기를 원하며,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빌 3:5-9).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감사함으로 영접한 그 믿음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인 세례 요한을 능가합니다.
그 축복은 모든 믿는 자에게 동일하게 열려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간절히 고대하며 바랐던 그 역사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취되었습니다.
바로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 20:22)로 그 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받으라’는 단어는 ‘영접하라’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성령강림은 이렇게 새 역사를 가르는 분수령이 됩니다.
김 재 구 목사
그런데 이 단어는 격을 넘어서 운명을 가름 짖는 행위이기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또한 영원한 운명의 갈림길이기에 중요도로 치면 비길 것이 없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례 요한과 바울을 가르는 분기점이 되기도 합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에 알리는 전령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메시아의 존재와 정체를 드러내는 사명이니 그 영광은 어디에다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특히 그 메시아가 세상을 구원할 하나님의 현존, 그 자체라고 한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일어남이 없다”(마 11:11)는 극찬으로 요약됩니다.
구약시대를 돌아보면 큰 자라고 할 만한 대단한 인물들이 여럿 떠오릅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엘리야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과 기적이 이들을 통해 펼쳐진 것을 생각하면 이런 인물들에 비하여 세례 요한이 한 일이라고는 회개의 세례밖에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례 요한은 새 시대의 전령으로서 이 모든 인물들에 비해 가장 큰 자라는 칭호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 칭호는 세례 요한을 높이려는 의도가 아닌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정도로 가치 있는 존재인가를 드러내시려는 의도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전에 나타나 세상에 소개하는 그 직분도 대단하지만, 예수님 이후에 주를 증거하는 그 직분이 훨씬 더 소중하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일어남이 없다”에 연속하여 ‘그러나’로 반전되는 말씀을 통해서 파악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마 11:11).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목적지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한복음은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바로 그 위상에 걸맞게 맞아들여 접대한다는 의미의 ‘영접’에 그 답이 들어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을 소개하는 역할로서의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여 증거 하는 자로서의 바울의 역할의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소개하였으나 영접까지는 이르지 않았고, 비록 박해하였으나 영접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현저한 차이를 만들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척도로 보자면 세례 요한은 삶에서 어떤 흠도 잡을 것이 없습니다.
철저한 금욕으로 광야에서 세상의 방식을 끊고 회개를 선포하며 주의 길을 예비하였고, 주를 세상에 소개하였습니다.
그에 비하면 바울은 교회를 박해하며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울도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까지는 철저하게 구약의 인물이었습니다.
율법에 정통하고,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며,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만 발견되기를 원하며,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빌 3:5-9).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감사함으로 영접한 그 믿음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인 세례 요한을 능가합니다.
그 축복은 모든 믿는 자에게 동일하게 열려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간절히 고대하며 바랐던 그 역사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취되었습니다.
바로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 20:22)로 그 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받으라’는 단어는 ‘영접하라’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성령강림은 이렇게 새 역사를 가르는 분수령이 됩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