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쾌한 원수 갚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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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171회 작성일Date 23-06-09 15:02본문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주제를 하나 들라고 한다면 단연 ‘복수’라는 ‘원수 갚음’일 것입니다.
잔혹한 경험을 한 사람이 그런 고통을 가한 사람을 향하여 되갚아 주는 것이 복수일 것입니다.
그런데 극히 자주 개인적으로 행하는 복수는 과도하게 행해질 때가 많으며 법의 한계선을 넘어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복수는 그것이 실행될 때는 통쾌하지만 그 끝 맛은 쓰디쓴 비극이 될 때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그리고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신 32:35; 롬 12:19)는 하나님의 말씀은 새로운 세상을 향한 발돋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에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미디안에 대한 “여호와의 원수를 갚으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민 31:3).
그 하나님의 원수 갚음에 이스라엘이 도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해서는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일에 대해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맡기라” 하시고는
하나님께서 원수 갚으시고 싶으실 때는 이스라엘을 이용하시는 것처럼 보이기에 모순처럼 보입니다. 흡사 서로를 돕는 품앗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원수 갚음’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원수가 되었다는 것은 곧 죄악을 저질렀다는 것이며 그 죄악도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출애굽한 이스라엘 구세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그 놀라운 이적을 보고서도 열 번이나 하나님을 시험하고
그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결국 광야에서 심판으로 진멸됩니다(민 14:22).
여기서 ‘열 번이나’라는 표현은 정확한 횟수보다는 한계를 넘어간 죄악의 상황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원수 갚음은 죄에 대한 심판의 의미라는 점에서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치는 전쟁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되어 징계를 행하는 것이기에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긍휼하시지만 또한 정의롭고, 공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자비와 긍휼은 우리를 구원과 생명의 길로, 정의와 공의는 우리를 심판과 징계의 길에 서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악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원수 갚는 것을 행하심으로 이 세상의 질서를 아름답게 이루시는 것입니다.
사탄은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갈 때에는 우리를 결코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우리를 감싸며 밤의 달도 낮의 해도 우리를 해치지 못하게 막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그 삶의 길을 버리고 죄악 된 길에 들어서게 함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원수가 되게 만들어 심판을 초래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탄의 전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탄의 전략을 무색하게 만드는 최고로 통쾌한 원수 갚음의 길을 여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게 구원받은 우리는 물론, 아직도 구원이 필요한 수많은 인생들을 죽음으로 몰아가지 않으시려고 그 길을 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 앞에서 보란 듯이 정의와 공의의 원수 갚음을 자신에게 철저하고도 완전하게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하여는 자비와 긍휼을 베푸셔서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신다는 약속까지 주셨습니다(요일 1:9).
이것은 곧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원수 갚음이며,
죄를 빌미로 늘 사람을 무너뜨리려 지금도 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사탄을 향한 결정적 한 방이며,
통쾌한 원수 갚음입니다. 이제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복수가 아닌 용서로 나아갈 때 사탄을 향한 통쾌한 원수 갚음은 계속될 것입니다.
김 재 구 목사
잔혹한 경험을 한 사람이 그런 고통을 가한 사람을 향하여 되갚아 주는 것이 복수일 것입니다.
그런데 극히 자주 개인적으로 행하는 복수는 과도하게 행해질 때가 많으며 법의 한계선을 넘어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복수는 그것이 실행될 때는 통쾌하지만 그 끝 맛은 쓰디쓴 비극이 될 때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그리고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신 32:35; 롬 12:19)는 하나님의 말씀은 새로운 세상을 향한 발돋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에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미디안에 대한 “여호와의 원수를 갚으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민 31:3).
그 하나님의 원수 갚음에 이스라엘이 도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해서는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일에 대해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맡기라” 하시고는
하나님께서 원수 갚으시고 싶으실 때는 이스라엘을 이용하시는 것처럼 보이기에 모순처럼 보입니다. 흡사 서로를 돕는 품앗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원수 갚음’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원수가 되었다는 것은 곧 죄악을 저질렀다는 것이며 그 죄악도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출애굽한 이스라엘 구세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그 놀라운 이적을 보고서도 열 번이나 하나님을 시험하고
그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결국 광야에서 심판으로 진멸됩니다(민 14:22).
여기서 ‘열 번이나’라는 표현은 정확한 횟수보다는 한계를 넘어간 죄악의 상황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원수 갚음은 죄에 대한 심판의 의미라는 점에서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치는 전쟁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되어 징계를 행하는 것이기에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긍휼하시지만 또한 정의롭고, 공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자비와 긍휼은 우리를 구원과 생명의 길로, 정의와 공의는 우리를 심판과 징계의 길에 서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악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원수 갚는 것을 행하심으로 이 세상의 질서를 아름답게 이루시는 것입니다.
사탄은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갈 때에는 우리를 결코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우리를 감싸며 밤의 달도 낮의 해도 우리를 해치지 못하게 막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그 삶의 길을 버리고 죄악 된 길에 들어서게 함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원수가 되게 만들어 심판을 초래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탄의 전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탄의 전략을 무색하게 만드는 최고로 통쾌한 원수 갚음의 길을 여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게 구원받은 우리는 물론, 아직도 구원이 필요한 수많은 인생들을 죽음으로 몰아가지 않으시려고 그 길을 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 앞에서 보란 듯이 정의와 공의의 원수 갚음을 자신에게 철저하고도 완전하게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하여는 자비와 긍휼을 베푸셔서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신다는 약속까지 주셨습니다(요일 1:9).
이것은 곧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원수 갚음이며,
죄를 빌미로 늘 사람을 무너뜨리려 지금도 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사탄을 향한 결정적 한 방이며,
통쾌한 원수 갚음입니다. 이제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복수가 아닌 용서로 나아갈 때 사탄을 향한 통쾌한 원수 갚음은 계속될 것입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