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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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171회 작성일Date 23-05-20 15:44본문
우리는 본능적으로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자기애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건강한 자기애는 자신을 존중하며, 자존감을 바르게 하고, 자신감을 키우며, 사람들 사이에서 잘 어울려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도해지면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커지며,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무시함으로 관계에 문제를 일으키는 장애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문제를 일으키는 요소가 아니라면 적당한 자기애는 자신감을 가지고 삶을 활력 있게 만들어가는 긍정적 요인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인으로서 정체성에 혼선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 예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살아가야 할 신앙의 모습을 의미하는 유행어 같은 말을 들 수 있습니다.
바로 ‘나는 죽고 예수로만 사는 삶’입니다. 세상이라는 거친 바다에서 생존이라는 숙명을 안고 살아가는 그 삶만으로도 참 버겁고 힘겨운데 그 안에서 죽고,
오직 예수님의 형상만 드러나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하니 또 하나의 짐이 올려진 듯 무겁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에 자기애라는 것이 끼어들 여지가 있을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분명 그 말이 유행되게 한 사람이 목회자일테니 목회자를 향해 교회 안에서만 맴도는 삶이라 세상이 얼마나 전쟁터 같은지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한다는 비판도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행어가 되게 한 사람은 목회자일지 모르지만 그 말의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있으니 결국 하나님이 그 비판의 궁극적인 대상이 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단지 손과 다리에 못이 관통하여 팔다리를 못 쓰는 조금 부자유스러운 그런 상태가 아니라, 산 존재가 아닌 죽은 존재임을 분명히 합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 속에 ‘내 자아’가 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자기애’라는 것도 동시에 존재치 않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아니 더 바른 질문은 “왜 이렇게 해야 할까요?”가 맞을 듯합니다. ‘내 자아’나 ‘자기애’가 없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역시 그 답은 무엇이 그것을 대신해 줄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의 자아와 자기애는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성장한다는 것은 완성된 기준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기준이 분명치 않으면 자기애는 분명 왜곡된 방향으로 나아가며
사람들 사이에서 불일치를 넘어서 다툼과 분열이라는 심각한 사회현상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한 번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할 것이 정말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르게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점입니다.
각자가 기준이 된다면, 사랑의 정의조차 스스로 내릴 수 없으며 자기애는 수천, 수만, 수억 개로 나뉠 것입니다.
사랑의 원조를 만나지 못하면 각자의 자기애는 이기심과 자기중심성이라는 독선을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답할 수 있는 것은 누가 자아와 자기애를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인가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완전한 사랑’을 만나는 순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즉 성장이 필요 없는 완전한 자아와 완전한 사랑이신 그 기준을 만나는 것입니다.
사랑의 완성을 전하는 아가서는 그 사랑을 찾은 여성의 고백을 전합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아 7:10).
이렇게 자신을 다 내어주는 완전한 사랑을 만나면 그분께 자신의 자아는 물론 자기애로 뭉쳐졌던 사랑까지 기꺼이 내어주는 응답이 일어납니다(아 7:12).
그 분께 속하여 완전한 사랑, 그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자아가 만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김 재 구 목사
물론 건강한 자기애는 자신을 존중하며, 자존감을 바르게 하고, 자신감을 키우며, 사람들 사이에서 잘 어울려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도해지면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커지며,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무시함으로 관계에 문제를 일으키는 장애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문제를 일으키는 요소가 아니라면 적당한 자기애는 자신감을 가지고 삶을 활력 있게 만들어가는 긍정적 요인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인으로서 정체성에 혼선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 예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살아가야 할 신앙의 모습을 의미하는 유행어 같은 말을 들 수 있습니다.
바로 ‘나는 죽고 예수로만 사는 삶’입니다. 세상이라는 거친 바다에서 생존이라는 숙명을 안고 살아가는 그 삶만으로도 참 버겁고 힘겨운데 그 안에서 죽고,
오직 예수님의 형상만 드러나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하니 또 하나의 짐이 올려진 듯 무겁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에 자기애라는 것이 끼어들 여지가 있을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분명 그 말이 유행되게 한 사람이 목회자일테니 목회자를 향해 교회 안에서만 맴도는 삶이라 세상이 얼마나 전쟁터 같은지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한다는 비판도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행어가 되게 한 사람은 목회자일지 모르지만 그 말의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있으니 결국 하나님이 그 비판의 궁극적인 대상이 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단지 손과 다리에 못이 관통하여 팔다리를 못 쓰는 조금 부자유스러운 그런 상태가 아니라, 산 존재가 아닌 죽은 존재임을 분명히 합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 속에 ‘내 자아’가 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자기애’라는 것도 동시에 존재치 않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아니 더 바른 질문은 “왜 이렇게 해야 할까요?”가 맞을 듯합니다. ‘내 자아’나 ‘자기애’가 없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역시 그 답은 무엇이 그것을 대신해 줄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의 자아와 자기애는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성장한다는 것은 완성된 기준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기준이 분명치 않으면 자기애는 분명 왜곡된 방향으로 나아가며
사람들 사이에서 불일치를 넘어서 다툼과 분열이라는 심각한 사회현상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한 번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할 것이 정말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르게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점입니다.
각자가 기준이 된다면, 사랑의 정의조차 스스로 내릴 수 없으며 자기애는 수천, 수만, 수억 개로 나뉠 것입니다.
사랑의 원조를 만나지 못하면 각자의 자기애는 이기심과 자기중심성이라는 독선을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답할 수 있는 것은 누가 자아와 자기애를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인가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완전한 사랑’을 만나는 순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즉 성장이 필요 없는 완전한 자아와 완전한 사랑이신 그 기준을 만나는 것입니다.
사랑의 완성을 전하는 아가서는 그 사랑을 찾은 여성의 고백을 전합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아 7:10).
이렇게 자신을 다 내어주는 완전한 사랑을 만나면 그분께 자신의 자아는 물론 자기애로 뭉쳐졌던 사랑까지 기꺼이 내어주는 응답이 일어납니다(아 7:12).
그 분께 속하여 완전한 사랑, 그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자아가 만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