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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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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147회 작성일Date 23-04-29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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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군가의 편이 된다는 것은 그 편의 주의를 따라간다는 의미가 들어가 있습니다.
때로는 주의나 주장만이 아닌 생사까지도 함께하는 운명공동체가 되는 것이기에 편을 고를 때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편 고르기의 엄중함을 생각할 때 모세의 이야기 속에 한 가지 의문스러운 사건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딸에게 입양되어, 궁에서 왕자 중의 한 명으로 자랐습니다.
이런 위치라면 우발적으로 애굽인 한 명을 죽이고 모래에 묻어버린 사건이 그 당시에 무슨 큰 이슈가 될 수 있을까싶습니다.
바로 왕이 신으로 숭배되던 세상이니, 그 신의 가족이라고 한다면 백성들의 생사여탈권이 주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찾았다라고 합니다(출 2:15).
그렇다면 이 사건은 왕실의 친인척으로 자란 모세의 우발적인 살인사건이 아니라, 자신의 민족정체성에 대한 결정의 선포이며, 자신의 편을 정한 사건이 분명합니다.
이스라엘로서는 대단한 동지를 얻은 것이지만 바로에게는 위협적인 반역의 조짐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세의 선택은 바로의 노예제에 기반을 둔 절대왕정인 전제정치에 대한 저항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바로에게는 제국의 안녕을 뒤 흔드는 치명적인 요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노예들의 혁명이 불꽃처럼 일어날 수 있는 발화점이 될 수 있기에 바로로서는 조기에 진압해야 하는 골치 거리인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 11:24-25).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편이 되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편을 선택하는 것에는 상반되는 운명의 갈림길이 있습니다.
한 가지를 버려야만 다른 것을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는 것’을 거절해야만 ‘하나님의 백성’을 택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거절과 선택 속에는 단순한 정체성의 변화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의 변화 또한 포함됩니다. ‘낙을 누리는 것’과 ‘고난 감수’라는 두 가지의 상반된 길입니다.
어느 누구든지 이 두 가지 중에 택하라고 한다면 ‘낙을 누리는 것’에 쉽게 현혹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세상 속에서 ‘낙을 누리는 것’은 그 ‘낙’ 앞에 붙는 것이 다르기에 치명적입니다.
바로 ‘죄악의 낙’입니다. 죄악의 낙이면서 그것마저도 ‘잠시(프로스카이로스)’밖에는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 앞에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습니다.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편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편을 정한다는 것은 가볍지 않은 삶의 차이를 가져옵니다.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며 예수님의 편이 되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는 말씀은 한 편이 된 끈끈함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이렇게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한 편이 되었다면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라”(롬 8:17)는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 고난이 무엇일까요? 바울 사도는 그 고난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받는 괴로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도리어 기뻐하며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합니다(골 1:24).
바울이 이렇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기꺼이 기쁨, 즉 낙으로 받는 것은 영원한 ‘그리스도의 날’(빌 2:16)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프로스카이로스)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자신이 어느 편인지는 ‘잠깐’과 ‘영원’ 중 어디에 서 있느냐로 알 수 있습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