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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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332회 작성일Date 23-02-25 16:28본문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요? 사람의 능력에 대해 확신에 찬 어떤 사람들은 인류가 언젠가는 모든 질병을 정복하고, 영생도 가능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합니다. 설사 그런 날이 올지 안 올지는 모르겠지만 온다 해도 이 인간의 유한한 육신으로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의 영생은 달갑지 않습니다. 그리고 빈부귀천에 따라 영생을 얻을 수 있고, 잃을 수 있다면 그건 분명 또 하나의 사회악이 될 것입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 모든 문제의 답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로 나사로라는 사람입니다. 그 누이들이 나사로가 사람의 의술로는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요 11:3)라는 전갈을 급하게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전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오셨다가 유대인들이 잡고자 함으로 유대 지역을 떠나 요한이 세례 주던 곳인 요단 강 건너편의 베다니에 머물고 계셨습니다(요 10:40; 1:28). 같은 이름인 나사로의 동네 감람산의 베다니까지는 신속하게 달려가도 꽤 먼 거리였을 것인데(약 40km) 예수님께서는 왠지 머뭇거리시며 움직이질 않으십니다. 나사로의 누이들이 강조점을 넣어서 전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는 말이 무색할 지경입니다. ‘사랑’이 이렇게 무심하고, 냉정한 것이라면 할만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리고는 하시는 말씀이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단언하십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죽어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진동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인데 이게 무슨 모순 같은 상황일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말씀하시고, 제자들은 그러면 낫겠다고 응답합니다. 잠들어 쉰다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제서야 제자들에게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십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셨다가 이제는 죽었다고 하시니 제자들이 이 상황에 내심 당황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거기에 있지 아니한 것을 제자들을 위해 기뻐하신다고까지 하시니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하려고 계획한 일이라 하시니 그 믿음이 어떤 것인지 궁금증을 유발합니다. 그렇게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도착했고, 나사로는 죽은지 이미 나흘이 되어버렸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입에서 나온 동일한 말인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32)는 그들의 믿음 상태를 보여주며, 제자들의 상태 또한 드러냅니다. 죽음 앞에서 무능 그 자체를 드러내는 이들의 안타까운 호소의 중심에 예수님의 선포와 영생을 향한 질문이 죽은 자의 무덤을 가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믿음에 대한 이 물음은 육신의 죽음을 향해 가는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내용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음도 죽음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는 이미 영생을 가졌기에 죽음이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육적 질병으로 인한 죽음이 죽음이 아닌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존재이니 그는 죽어도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 수수께끼 같은 반드시 죽을 것임에도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닌 분명한 답이 들어있습니다. 이미 영생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육신의 그 어떤 질병도 결코 죽을 병이 아닙니다. 육신의 생명이 끝날지라도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부르셨던 것처럼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부를 때에 잔치참여 하는 날”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 재 구 목사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