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을 넘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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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163회 작성일Date 23-05-20 15:48본문
성경을 읽노라면 이해 못할 내용들에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거나 난해하기 때문일 때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경건치 않은 잔인하고 추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빌레몬서를 읽으며 느끼는 감정은 조금 다릅니다.
이 속에는 내용의 난해함도 없고,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잔혹함이나 추함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서신 속에는 모든 것이 선명합니다. 보낸 사람, 받는 사람이 명확하고, 서신을 보낸 이유 또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25절의 335단어로 이루어져 바울 서신중에서 가장 짧기에 어느 누구나 전체적인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장점 또한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서신은 읽는 이를 난해하게 만드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이라는 개인에게 쓴 지극히 사적인 서신에 불과한데 어떻게 기독교 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는 성경에 그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입니다.
시대를 초월하여 신앙 공동체에 주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기에 이 짧은 개인 서신이 지금 전 세계 수십억의 기독교인들이 읽는 성경의 한 권이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을 입증하듯이 이 속에는 개인적인 서신의 차원을 넘어서는 중요한 사항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바울 당시 기독교 공동체가 극복해야 할 심각한 어려움 중의 한 가지였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공동체 안의 주인과 종의 관계성입니다. 기독교는 귀족만을 위한 신앙도 또 천민만을 위한 종교도 아닙니다.
어떤 위치의 사람이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초대 기독교 공동체 안에는 분명히 귀족들과 그들을 섬기는 종들도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집안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가 공동체 모임에서는 형제와 자매의 관계로 전환된다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배경 하에 바울은 지금 빌레몬이라는 골로새에 살고 있는 유력한 사람에게 간곡한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 이유인 즉은 오네시모라는 종이 그 주인인 빌레몬에게 어떤 손해를 끼치고 도망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바울로 인하여 예수님을 영접하였으며,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기에 둘의 관계회복을 위함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을 것을 간곡히 부탁하기 위해서 이 서신을 씁니다.
이 서신에서 바울은 결코 그의 권위로 빌레몬에게 강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깊은 사랑의 마음으로 그에게 정중히 간구합니다.
그리고 이 편지는 간곡한 부탁이지만 빌레몬을 향한 바울의 확신 또한 들어 있음을 쉽게 느껴볼 수 있습니다.
분명 빌레몬이 자신의 부탁을 거절치 않고 기쁨으로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고 예전의 모든 것을 용서하리라는 기대가 묻어납니다.
이 서신이 기독교 경전인 성경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은 이것은 비단 빌레몬과 오네시모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기독교 공동체 안에 빈번히 발생되는 일이었음을 짐작케 하며, 이에 대해 신앙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길잡이가 되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도망간 종, 그것도 피해를 끼치고 도망한 종을 형제로 받는 용서와 포용은 강권적인 억지가 되어서는 안 되며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와 받아들임을 통해 상전과 종이 형제가 되고, 그렇게 연합한 형제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본의 역할을 잘 감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구전에 의하면 오네시모가 나중에 에베소 지역의 주교가 되어 죽기까지 주를 위해 애썼다는 내용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일은 빌레몬의 용서와 포용을 전제합니다.
그러므로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이야기는 지금도 전통과 문화의 장벽을 넘어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구별이 없이 사랑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의 좋은 본보기임에 틀림없습니다.
김 재 구 목사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경건치 않은 잔인하고 추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빌레몬서를 읽으며 느끼는 감정은 조금 다릅니다.
이 속에는 내용의 난해함도 없고,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잔혹함이나 추함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서신 속에는 모든 것이 선명합니다. 보낸 사람, 받는 사람이 명확하고, 서신을 보낸 이유 또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25절의 335단어로 이루어져 바울 서신중에서 가장 짧기에 어느 누구나 전체적인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장점 또한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서신은 읽는 이를 난해하게 만드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이라는 개인에게 쓴 지극히 사적인 서신에 불과한데 어떻게 기독교 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는 성경에 그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입니다.
시대를 초월하여 신앙 공동체에 주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기에 이 짧은 개인 서신이 지금 전 세계 수십억의 기독교인들이 읽는 성경의 한 권이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을 입증하듯이 이 속에는 개인적인 서신의 차원을 넘어서는 중요한 사항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바울 당시 기독교 공동체가 극복해야 할 심각한 어려움 중의 한 가지였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공동체 안의 주인과 종의 관계성입니다. 기독교는 귀족만을 위한 신앙도 또 천민만을 위한 종교도 아닙니다.
어떤 위치의 사람이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초대 기독교 공동체 안에는 분명히 귀족들과 그들을 섬기는 종들도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집안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가 공동체 모임에서는 형제와 자매의 관계로 전환된다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배경 하에 바울은 지금 빌레몬이라는 골로새에 살고 있는 유력한 사람에게 간곡한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 이유인 즉은 오네시모라는 종이 그 주인인 빌레몬에게 어떤 손해를 끼치고 도망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바울로 인하여 예수님을 영접하였으며,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기에 둘의 관계회복을 위함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을 것을 간곡히 부탁하기 위해서 이 서신을 씁니다.
이 서신에서 바울은 결코 그의 권위로 빌레몬에게 강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깊은 사랑의 마음으로 그에게 정중히 간구합니다.
그리고 이 편지는 간곡한 부탁이지만 빌레몬을 향한 바울의 확신 또한 들어 있음을 쉽게 느껴볼 수 있습니다.
분명 빌레몬이 자신의 부탁을 거절치 않고 기쁨으로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고 예전의 모든 것을 용서하리라는 기대가 묻어납니다.
이 서신이 기독교 경전인 성경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은 이것은 비단 빌레몬과 오네시모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기독교 공동체 안에 빈번히 발생되는 일이었음을 짐작케 하며, 이에 대해 신앙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길잡이가 되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도망간 종, 그것도 피해를 끼치고 도망한 종을 형제로 받는 용서와 포용은 강권적인 억지가 되어서는 안 되며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와 받아들임을 통해 상전과 종이 형제가 되고, 그렇게 연합한 형제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본의 역할을 잘 감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구전에 의하면 오네시모가 나중에 에베소 지역의 주교가 되어 죽기까지 주를 위해 애썼다는 내용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일은 빌레몬의 용서와 포용을 전제합니다.
그러므로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이야기는 지금도 전통과 문화의 장벽을 넘어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구별이 없이 사랑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의 좋은 본보기임에 틀림없습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