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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철 열매 같던 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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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1회 작성일Date 26-03-31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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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와 온 교회 성도님들의 배려로 주어진 4개월의 안식년, 그 반환점을 돌 때쯤 드디어 제주살이가 시작되었습니다. 숙소 거실의 통유리창 너머로 당당하게 서 있는 소철 나무들이 보이고, 그 곁으로는 한라봉이 주렁주렁 매달린 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조금만 걸어가면 바다를 품은 올레길이 나타나니, 이토록 소중한 시간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풍경입니다.
  며칠간 머물며 유독 제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당 한편의 소철 나무 아래 떨어진, 500원 동전 크기만한 타원형 열매들이었습니다. 평소 식물에 관심이 많던 터라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얇은 막을 벗겨낸 열매는 피칸이나 호두처럼 아주 단단했습니다. 속이 궁금해 발로 깨뜨려 보니 의외로 하얀 분말이 가득했습니다. 호기심에 맛을 보려 하자, 과거 독성 있는 나물을 먹고 고생했던 저를 기억하는 아내가 강력히 만류했습니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소철 열매가 어떤 성분을 가지고 있나를 쳇GPT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답변은 “소철의 열매에는 독성이 있습니다. 특히 ‘사이카신(cycasin)’이라는 독성 물질이 들어있어 날것으로 먹으면 구토, 간 손상, 신경계 이상 등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라는 응답이 왔습니다. 아내는 승기를 잡은 듯 의기양양했지만, 제 마음을 흔든 문장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철 열매는 유용하게 사용되어 왔습니다.”라는 언급이었습니다.
  일본 오키나와 등지에서는 기근이 닥쳤을 때 이 열매를 식량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독을 빼기 위해 물에 여러 번 씻고 오래 담가 발효시키는 정성스러운 과정을 거치면, 사람을 죽이는 독이 사람을 살리는 귀한 전분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동아시아 일부 지역에서는 이를 말려 통증을 완화하고 혈액순환을 돕는 약재로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에 결코 버려질 영혼이나 포기해야 할 사람은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치명적인 독을 품은 열매라도 정화와 정성의 시간을 거치면 생명의 양식이 되듯, 그 어떤 완악한 죄인이라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존재가 된다는 진리를 다시 새기게 됩니다.
  본래 우리는 독성으로 가득한 소철 열매와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케 하시어 마침내 ‘성령의 열매’로 빚어내시는 주님의 손길이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이를 위해 기꺼이 피와 물을 다 쏟아부어 주시는 이 사순절의 사랑이 더욱 감사함으로 다가옵니다. 남은 안식년의 시간, 생수의 강에 젖어 제 안의 독기는 빠지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양식만이 가득 차기를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