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흔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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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040회 작성일Date 23-10-21 17:18본문
인생의 여정을 걷노라면 신앙인이든, 아니든 사람들은 서로가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고받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서로 대놓고 다툼을 벌이며 쌍방이 주고받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혹은 부지불식간에 말 한 마디로, 부주의한 행동 하나로 고통을 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개인간 뿐만 아니라, 나라와 나라 간에 잊을 수 없을 만큼 극심한 고통을 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아직도 교전 중에 있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사이에 무력 충돌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개인 대 개인, 혹은 단체 대 단체, 심지어는 나라 대 나라 사이에 발생하는 이런 상처와 고통은 대부분이 받은 것에 대한 갚음으로 인해 생겨나게 됩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러한 세상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세상이 안고 있는 상처들, 고통들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를 깊이 숙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아픔들로 인한 부르짖음들, 때로는 잠복된 채로 앙금이 되어 쌓여가며 폭발할 날만 아슬아슬 기다리는 분노들을 그대로 둔다면 개인이든, 공동체든, 나라든 위험하기는 매 한 가지일 것입니다. 상처가 아물어 삶에 어떠한 악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길은 찾을 수 없는 것인가 생각해 봅니다.
결국 그 해답은 세상의 모든 악을 한 몸에 다 받아들여 채찍에 맞고, 못 박히며, 창으로 찔려 만신창이가 된 몸과 그 악으로 인한 조롱과 비방까지도 모조리 흡수하여 이 세상 모든 감정 노동자들의 너덜해진 마음 그 이상을 다 경험하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그 전에 살았던 사람들, 지금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 땅에 종말이 올 때까지 살아갈 미래의 사람들이 겪을 모든 상처와 고통까지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고 하신 예수님께만 유일한 해결의 길이 있습니다(요 19:30). 그 모든 것을 다 받으시고 제자들에게 오셔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라고 선포하신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이 세상의 죄로 인한 상처와 고통까지 다 씻어내신 분만이 이 땅에 샬롬의 평화를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십자가는 결코 반격을 위한 갚음의 자리도, 분노를 앙금처럼 쌓아가는 자리도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상처와 고통을 씻어내는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상처를 홀로 다 받으신 그 몸으로 제자들에게 오셔서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며 기꺼이 손가락을 못 자국에,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하십니다. 상처가 사랑의 흔적이 되어서 사람들을 기꺼이 품는 공간이 되었으며, 믿음으로 평화를 이루는 시작이 된 것입니다.
이 사랑을 제대로 받고, 이해한 삶을 살아간 바울은 그 어떤 여건과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어갑니다. 수고를 넘치도록 하며, 옥에 갇히고, 매도 수없이 맞고, 돌에 맞고,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고, 위험이란 위험을 다 겪었으며(고후 11:23-27), 비방과 조롱을 받아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은 여김을 받을 지라도(고전 4:12-13) 그것이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였습니다. 그로 인해 늘 그의 입에서는 자신에게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모든 성도들을 향해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를 선언하는 사도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는 상처가 예수의 흔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김 재 구 목사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러한 세상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세상이 안고 있는 상처들, 고통들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를 깊이 숙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아픔들로 인한 부르짖음들, 때로는 잠복된 채로 앙금이 되어 쌓여가며 폭발할 날만 아슬아슬 기다리는 분노들을 그대로 둔다면 개인이든, 공동체든, 나라든 위험하기는 매 한 가지일 것입니다. 상처가 아물어 삶에 어떠한 악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길은 찾을 수 없는 것인가 생각해 봅니다.
결국 그 해답은 세상의 모든 악을 한 몸에 다 받아들여 채찍에 맞고, 못 박히며, 창으로 찔려 만신창이가 된 몸과 그 악으로 인한 조롱과 비방까지도 모조리 흡수하여 이 세상 모든 감정 노동자들의 너덜해진 마음 그 이상을 다 경험하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그 전에 살았던 사람들, 지금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 땅에 종말이 올 때까지 살아갈 미래의 사람들이 겪을 모든 상처와 고통까지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고 하신 예수님께만 유일한 해결의 길이 있습니다(요 19:30). 그 모든 것을 다 받으시고 제자들에게 오셔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라고 선포하신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이 세상의 죄로 인한 상처와 고통까지 다 씻어내신 분만이 이 땅에 샬롬의 평화를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십자가는 결코 반격을 위한 갚음의 자리도, 분노를 앙금처럼 쌓아가는 자리도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상처와 고통을 씻어내는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상처를 홀로 다 받으신 그 몸으로 제자들에게 오셔서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며 기꺼이 손가락을 못 자국에,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하십니다. 상처가 사랑의 흔적이 되어서 사람들을 기꺼이 품는 공간이 되었으며, 믿음으로 평화를 이루는 시작이 된 것입니다.
이 사랑을 제대로 받고, 이해한 삶을 살아간 바울은 그 어떤 여건과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어갑니다. 수고를 넘치도록 하며, 옥에 갇히고, 매도 수없이 맞고, 돌에 맞고,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고, 위험이란 위험을 다 겪었으며(고후 11:23-27), 비방과 조롱을 받아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은 여김을 받을 지라도(고전 4:12-13) 그것이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였습니다. 그로 인해 늘 그의 입에서는 자신에게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모든 성도들을 향해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를 선언하는 사도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는 상처가 예수의 흔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