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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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2,098회 작성일Date 14-05-03 09:47본문
거룩한 분노
요즈음 뉴스를 보면 화가 납니다. 이백 명 이상의 어린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가다가 배 침몰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에 안타까움 보다 오히려 분노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번 진도 앞 바다의 배 침몰이 사고(事故)가 아니라 사건(事件)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사고(事故)란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비가 많이 왔거나 태풍이 불었거나 또는 우주에서 별이 날아와서 지구와 부딪혀서 희생자가 생겼다면 그것은 사고입니다. 반면에 사건(事件)은 특정인이나 특정 그룹이 원인을 제공하여 일어난 결과 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살펴보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것 같이 보이는 사고 속에 그럴 수밖에 없는 원인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고보다는 사건이라고 해야 하는 일들이 마치 어쩔 수 없이 발생한 사고인양 위장 되고 있습니다.
이번 진도 앞바다 배 침몰 사고도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사고가 아니라 사건입니다. 침몰 할 수 있는 여러 원인들을 제공한 사람이나 그룹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뉴스의 보도를 보면서 안타까움 보다 오히려 분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면 안타까움과 슬픔이 더 컸겠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뉴스 보도를 보는 우리의 마음에는 분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쩌면 희생자들에 대한 막연한 미안함 보다는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대상에게 분노를 느끼는 것이 더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대상을 향해 분노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요11:38) 나사로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는 가족들, 죽음 앞에서 낙심 하는 사람들을 보시며 예수님은 통분하십니다. 분노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시기보다 오히려 분노하십니다. 그 분노의 대상은 사망을 권세로 악용하며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탄이었습니다. 죽음은 사탄의 무기가 아닙니다. 죽음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부활의 입구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이 죽음을 마치 자기의 권세인양 사람들을 속이고 위협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탄을 향해 분노하십니다.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십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안타까움 보다 더 큰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거짓과 잘못을 바로 잡으시고 사탄의 위협을 깨뜨리십니다. 분노는 안타까움 보다 더 확실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지금은 미안하거나 안타까워할 때가 아니라 분노할 때입니다. 탐욕과 부조리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어둠의 세력을 향해 분노해야 할 때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미안한 마음에 남아 있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의 죄책감에 묶여 있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노 하십니다. 통분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로 주저앉아 있는 심령들이 실의와 탄식에서 일어나기를 기도드립니다. 나팔수 강 승 구
나팔수 강 승
요즈음 뉴스를 보면 화가 납니다. 이백 명 이상의 어린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가다가 배 침몰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에 안타까움 보다 오히려 분노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번 진도 앞 바다의 배 침몰이 사고(事故)가 아니라 사건(事件)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사고(事故)란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비가 많이 왔거나 태풍이 불었거나 또는 우주에서 별이 날아와서 지구와 부딪혀서 희생자가 생겼다면 그것은 사고입니다. 반면에 사건(事件)은 특정인이나 특정 그룹이 원인을 제공하여 일어난 결과 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살펴보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것 같이 보이는 사고 속에 그럴 수밖에 없는 원인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고보다는 사건이라고 해야 하는 일들이 마치 어쩔 수 없이 발생한 사고인양 위장 되고 있습니다.
이번 진도 앞바다 배 침몰 사고도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사고가 아니라 사건입니다. 침몰 할 수 있는 여러 원인들을 제공한 사람이나 그룹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뉴스의 보도를 보면서 안타까움 보다 오히려 분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면 안타까움과 슬픔이 더 컸겠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뉴스 보도를 보는 우리의 마음에는 분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쩌면 희생자들에 대한 막연한 미안함 보다는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대상에게 분노를 느끼는 것이 더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대상을 향해 분노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요11:38) 나사로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는 가족들, 죽음 앞에서 낙심 하는 사람들을 보시며 예수님은 통분하십니다. 분노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시기보다 오히려 분노하십니다. 그 분노의 대상은 사망을 권세로 악용하며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탄이었습니다. 죽음은 사탄의 무기가 아닙니다. 죽음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부활의 입구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이 죽음을 마치 자기의 권세인양 사람들을 속이고 위협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탄을 향해 분노하십니다.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십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안타까움 보다 더 큰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거짓과 잘못을 바로 잡으시고 사탄의 위협을 깨뜨리십니다. 분노는 안타까움 보다 더 확실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지금은 미안하거나 안타까워할 때가 아니라 분노할 때입니다. 탐욕과 부조리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어둠의 세력을 향해 분노해야 할 때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미안한 마음에 남아 있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의 죄책감에 묶여 있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노 하십니다. 통분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로 주저앉아 있는 심령들이 실의와 탄식에서 일어나기를 기도드립니다. 나팔수 강 승 구
나팔수 강 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