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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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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2,024회 작성일Date 14-08-16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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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  량
  1597년, 임진왜란 시 이순신 장군의 명량 대첩을 영화화 한 역사물 ‘명량’ 이 연일 관객 동원 신기록을 경신하고 있습니다. 개봉 사흘 만에 이백만 관객을 넘어섰으며, 하루 100만 명이 관람하는 희귀한 기록도 세웠습니다. 박 대통령도 극장에 가서 시민들과 함께 영화 관람을 하셨다니 과연 국민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생들도 잘 아는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가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새롭게 관심을 갖게 하는 데에는 현재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국제 관계가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본은 연일 독도 분쟁과 위안부 관련 망언(妄言)으로 우리 국민감정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이런 국민 정서를 영화 ‘명량’이 스크린에서 나마 후련하게 해소시켜 주고 있는 듯합니다. 단 열 두척의 배로 일본의 이백 척 함대를 무찌른 ‘명량’ 해전은 보는 이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줍니다. 그러면서 또한 지도자 한 사람의 역할이 공동체를 변화 시키는데 얼마나 중요한 가를 새삼 깨닫게 해 줍니다. ‘두려움’을 ‘용기’ 로 바꾸는 것이 지도자가 해야 하는 일인데, 그러기위해서는 지도자가 죽어야 한다는 ‘필사즉생’(必死卽生)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일반적으로 ‘필사즉생’ 은 죽고자 하면 사는 것이라고  이해하는데, 이순신 장군은 이 말을 더 깊은 의미로 쓰고 있었습니다. 지도자가 죽으면 백성이 산다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죽음으로써 백성들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죽고자 하는 결단이 드디어는 백성들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게 합니다. 그 결과 일본을 몰아내고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십자가의 도를 알았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역사의 기록에서 찾을 수 없는, 외국의 선교사들이 우리 조상들에게 십자가의 진리를 가르쳤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의 ‘필사즉생’의 해석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는 십자가의 도 보다 더  깊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믿는 십자가의 도는 내가 주님과 함께 죽으면 주님과 같이 다시 살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 다시 사는 것은 나 하나 뿐 이지, 나로 인해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 전체가 다시 산다는 의식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 혼자 부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속 해 있는 우리 모두를 부활시키십니다. 따라서 내가 십자가의 도를 따를 때, 다시 사는 것은 나 뿐이 아니라 나의 가족, 교회, 이웃, 사회 전체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사망은 우리 안에, 생명은 너희 안에 라고 복수형을 쓰고 있습니다. (고후 4:12) 살아가면 갈수록, 신앙 하면 할수록, 인생의 중심축이 바뀌어 가는 것 같습니다. 나 중심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그리고 드디어는 공동체 중심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 신앙의 성숙이며 인생의 연륜이 아닌가 싶습니다. 십자가는 예배 중에의 중심 뿐 아니라 전쟁 승리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을 선한 싸움이라고 했는가 봅니다. 십자가의 도로 선한 싸움의 승리를 얻기를 소원 합니다.                                나팔수  강 승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