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바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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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2,254회 작성일Date 14-12-20 14:06본문
퀴바디스
요즈음 퀴바디스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사람들 사이에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2014년, 멀티플레이어 메가박스 제작) 우리나라 교회 목회자의 대표적 비리들 (돈, 명예, 세습, 성추행)을 고발하는 내용인데, 저는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인터넷을 통해 짧은 예고편을 보았습니다. 그 중에 ‘WHAT WOULD JESUS DO?’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피켓을 들고 길거리에서 일인 시위를 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피켓의 슬로건은 1990년대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된 미국의 찰스 M. 쉘던 목사의 소설제목을 그대로 본 딴 것입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 맥스웰 목사는 교회에 와서 도움을 청하던 실직 근로자가 도움을 받지 못한채 그만 죽게 되자 목사로써 깊은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성도들과 함께 일 년 간 모든 일들 앞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라는 질문을 먼저 스스로에게 던지기로 합니다. 소설은 이 질문을 던지는 일년간의 이야기들로 엮어집니다. 그 결과 일 년 전보다는 맥스웰 목사 자신이나 성도들 모두가 좀 더 예수님을 닮아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그 다큐멘터리 영화의 피켓을 든 장면과 그 슬로건의 소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를 비교하면서 과연 그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이 질문을 자신들에게 던져 보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는 부패한 천주교의 개혁을 외치면서 1200년간 천주교를 이끌어온 잘못된 교리를 바로 잡는 진리를 대안으로 내놓았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 칭의가 그 대표적 대안 이었습니다. 그 뒤를 이은 종교 개혁가들은 대안(代案) 있는 비판으로 기독교 신학을 정립해 나갔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의 비리를 고발하고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 대안으로 돈이나 명예를 추구하지 않고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교회를 그 대안으로 내어 놓아야 개혁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대안 없이 다만 비판만 하고 만다면 그것은 결코 더 나은 개혁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비난 받는 교역자들의 교회를 떠난 성도들이 갈 수 있는 건강하고 성숙된 교회를 대안으로 내어 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개혁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옛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으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시면서 잘못 된 율법의 해석에 대해 대안을 제시하셨습니다. (마 5~7장) 이것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쓰는 방법일 것입니다. 만약 그런 대안도 없이 비판만으로 끝나고 만다면 그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들이 가지는 허탈감은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무너뜨리는 것은 새로운 건설을 위함인 것 같이 비판은 건전한 개혁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대안 없는 비판은 개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건물의 잔재만을 바라보는 씁쓸함이 아닐런지요? 예수님이라면 이 부패한 교회를 위해서 다시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을까? (Wouldn’t Jesus carry the cross again?) 생각해 봅니다.
나팔수 강 승 구
요즈음 퀴바디스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사람들 사이에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2014년, 멀티플레이어 메가박스 제작) 우리나라 교회 목회자의 대표적 비리들 (돈, 명예, 세습, 성추행)을 고발하는 내용인데, 저는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인터넷을 통해 짧은 예고편을 보았습니다. 그 중에 ‘WHAT WOULD JESUS DO?’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피켓을 들고 길거리에서 일인 시위를 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피켓의 슬로건은 1990년대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된 미국의 찰스 M. 쉘던 목사의 소설제목을 그대로 본 딴 것입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 맥스웰 목사는 교회에 와서 도움을 청하던 실직 근로자가 도움을 받지 못한채 그만 죽게 되자 목사로써 깊은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성도들과 함께 일 년 간 모든 일들 앞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라는 질문을 먼저 스스로에게 던지기로 합니다. 소설은 이 질문을 던지는 일년간의 이야기들로 엮어집니다. 그 결과 일 년 전보다는 맥스웰 목사 자신이나 성도들 모두가 좀 더 예수님을 닮아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그 다큐멘터리 영화의 피켓을 든 장면과 그 슬로건의 소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를 비교하면서 과연 그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이 질문을 자신들에게 던져 보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는 부패한 천주교의 개혁을 외치면서 1200년간 천주교를 이끌어온 잘못된 교리를 바로 잡는 진리를 대안으로 내놓았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 칭의가 그 대표적 대안 이었습니다. 그 뒤를 이은 종교 개혁가들은 대안(代案) 있는 비판으로 기독교 신학을 정립해 나갔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의 비리를 고발하고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 대안으로 돈이나 명예를 추구하지 않고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교회를 그 대안으로 내어 놓아야 개혁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대안 없이 다만 비판만 하고 만다면 그것은 결코 더 나은 개혁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비난 받는 교역자들의 교회를 떠난 성도들이 갈 수 있는 건강하고 성숙된 교회를 대안으로 내어 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개혁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옛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으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시면서 잘못 된 율법의 해석에 대해 대안을 제시하셨습니다. (마 5~7장) 이것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쓰는 방법일 것입니다. 만약 그런 대안도 없이 비판만으로 끝나고 만다면 그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들이 가지는 허탈감은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무너뜨리는 것은 새로운 건설을 위함인 것 같이 비판은 건전한 개혁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대안 없는 비판은 개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건물의 잔재만을 바라보는 씁쓸함이 아닐런지요? 예수님이라면 이 부패한 교회를 위해서 다시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을까? (Wouldn’t Jesus carry the cross again?) 생각해 봅니다.
나팔수 강 승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