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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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2,091회 작성일Date 15-12-26 11:07본문
허상
새벽에 잠이 깼습니다. 꿈을 꾸다가 일어난 것 같았습니다. 꿈속의 나는 허상(虛想)이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네가 실상(實狀)이고 꿈속의 나는 진짜 내가 아닙니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난 나도 어쩌면 실상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실의 내가 실상이 아니라면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가? 목사로서의 나, 남편으로서의 나, 아버지로서의 나, 가족으로서의 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나, 친구인 나, 동료인 나, 한국인으로서의 나, 신장이 얼마, 몸무게 얼마로서의 나는 허상인지 모릅니다. 나를 둘러 싼 모든 것들이 나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항상 수식어가 붙어서 나를 나타냅니다. 나의 과거가 지금의 나를 만들어 내고 나의 현재가 미래의 나를 형성합니다. 실상인 내가 아니라 나의 허상을 만드는 환경과 상황이 만들어 내는 나는 여전히 허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현재의 나도, 미래의 나도 역시 허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가끔씩은 허상 속에 숨어 있는 나의 실상이 잠깐 그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내 모습이, 죄인인 내 모습, 부족한 내 모습, 부끄러운 내 모습이 실상이 되어 나타날 때면 진짜 내가 누구인가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곧 이어 나를 둘러 싼 환경과 상황이 실상을 덮고 다시 허상이 나를 만들어 냅니다. 목사로서, 남편으로서, 사회인과 한국인으로서, 세계 인류의 한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다시 꿈속의 나와 같이 허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더 이상 꿈속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을 때가옵니다. 잠에서 깨듯 꿈 속의 허상이 사라질 때가옵니다. 그 때를 세상은 죽음이라고 하고 사람들은 긴 꿈에서 깨어났다고 일장춘몽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이라고 합니다.(살전4:13)그 때에는 나의 허상이 벗겨질 것입니다. 그 때에는 감추어져 있던 나의 실상이 뚜렷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아무 수식어나 형용어가 붙지 않는 그대로의 내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실상일 것입니다.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실상이 하나님 앞에 설 것입니다.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달력만 한 장 남아 있습니다. 허상과 같이 살아온 지난날들을 그냥 둔 채 가만히 바라보기로만 합니다. 어차피 진짜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꿈을 꾸듯 허상은 지나가고 실상은 허상이 지난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서야 하는 독대자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새삼 떠오릅니다.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아담으로 설 때만이 나의 실상을 발견합니다. 불교에서는 허상을 버리기 위해 고행과 참선으로 내가 없어지는 무아(無我)를 이룬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허상이 없어지면 오히려 진짜 내가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나는 없어지는 무아가 아니라 실상을 되찾는 내가 됩니다. 허상인 나를 더 이상 만들지 않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실상을 연습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렇게 매일 진실하게 진짜 나를 하나님 앞에 세우다 보면 어느날 육체를 벗고 꿈을 깨듯이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욥 19:26) 그 때 나의 실상을 보며 당황하지 않는 준비를 매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새벽에 눈을 떠서 하나님 앞에 서는 기도와 말씀 묵상입니다. 새벽에 잠이 깼습니다. 허상을 깨고 실상으로 그 분 앞에 서고 싶습니다.
부끄러운 죄인의 실상으로 말입니다
나팔수 강 승 구
새벽에 잠이 깼습니다. 꿈을 꾸다가 일어난 것 같았습니다. 꿈속의 나는 허상(虛想)이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네가 실상(實狀)이고 꿈속의 나는 진짜 내가 아닙니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난 나도 어쩌면 실상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실의 내가 실상이 아니라면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가? 목사로서의 나, 남편으로서의 나, 아버지로서의 나, 가족으로서의 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나, 친구인 나, 동료인 나, 한국인으로서의 나, 신장이 얼마, 몸무게 얼마로서의 나는 허상인지 모릅니다. 나를 둘러 싼 모든 것들이 나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항상 수식어가 붙어서 나를 나타냅니다. 나의 과거가 지금의 나를 만들어 내고 나의 현재가 미래의 나를 형성합니다. 실상인 내가 아니라 나의 허상을 만드는 환경과 상황이 만들어 내는 나는 여전히 허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현재의 나도, 미래의 나도 역시 허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가끔씩은 허상 속에 숨어 있는 나의 실상이 잠깐 그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내 모습이, 죄인인 내 모습, 부족한 내 모습, 부끄러운 내 모습이 실상이 되어 나타날 때면 진짜 내가 누구인가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곧 이어 나를 둘러 싼 환경과 상황이 실상을 덮고 다시 허상이 나를 만들어 냅니다. 목사로서, 남편으로서, 사회인과 한국인으로서, 세계 인류의 한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다시 꿈속의 나와 같이 허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더 이상 꿈속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을 때가옵니다. 잠에서 깨듯 꿈 속의 허상이 사라질 때가옵니다. 그 때를 세상은 죽음이라고 하고 사람들은 긴 꿈에서 깨어났다고 일장춘몽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이라고 합니다.(살전4:13)그 때에는 나의 허상이 벗겨질 것입니다. 그 때에는 감추어져 있던 나의 실상이 뚜렷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아무 수식어나 형용어가 붙지 않는 그대로의 내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실상일 것입니다.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실상이 하나님 앞에 설 것입니다.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달력만 한 장 남아 있습니다. 허상과 같이 살아온 지난날들을 그냥 둔 채 가만히 바라보기로만 합니다. 어차피 진짜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꿈을 꾸듯 허상은 지나가고 실상은 허상이 지난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서야 하는 독대자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새삼 떠오릅니다.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아담으로 설 때만이 나의 실상을 발견합니다. 불교에서는 허상을 버리기 위해 고행과 참선으로 내가 없어지는 무아(無我)를 이룬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허상이 없어지면 오히려 진짜 내가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나는 없어지는 무아가 아니라 실상을 되찾는 내가 됩니다. 허상인 나를 더 이상 만들지 않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실상을 연습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렇게 매일 진실하게 진짜 나를 하나님 앞에 세우다 보면 어느날 육체를 벗고 꿈을 깨듯이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욥 19:26) 그 때 나의 실상을 보며 당황하지 않는 준비를 매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새벽에 눈을 떠서 하나님 앞에 서는 기도와 말씀 묵상입니다. 새벽에 잠이 깼습니다. 허상을 깨고 실상으로 그 분 앞에 서고 싶습니다.
부끄러운 죄인의 실상으로 말입니다
나팔수 강 승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