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얼마나 좋겠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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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2,119회 작성일Date 16-02-26 14:52본문
그러면 얼마나 좋겠노?
우리 교회 자매님의 어머니께서 소천 하셨습니다. 73세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약 한 달 전에 병상에서 복음을 받아 들이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일어나시지 못 해 누우신 채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칠 십 평생을 신앙 없이 사시던 분이 노년에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 들이는 것은 과연 기적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성도가 되어 돌아가신 어머니의 입관 예배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 가셨으니 영원한 부활의 몸으로 다시 일어 날 줄을 믿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 가족들과 고인과의 마지막 작별 인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인의 남동생이 울면서 ‘목사님 말대로 부활하여 다시 일어나면 얼마나 좋겠노!’ 하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 우셨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겠노!’ 하는 불신자 가족의 외침이 제 마음에 메아리쳐 왔습니다. 정말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노? 라는 외침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하는 강한 불신앙의 외침이며 또 하나는 정말 그렇다면 나도 예수 믿고 부활하고 싶다는 신앙에 대한 갈망 입니다. 이것은 아직 복음을 모르는 불신자로서는 당연한 의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성경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 신자들은 과연 부활이 있음을 얼마나 좋아하고 사는가 하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요 11:25~26) 우리는 이 말씀을 믿고 사는 그리스도인들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좋겠노! 하는 그 좋은 약속을 이미 받고 사는 사람들 입니다. 이 좋은 약속은 죽음 이후가 아니라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이미 누리고 사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의 생명을 이미 가지고 살기 때문 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이 생명이 있음은 재산을 많이 가진 것 보다, 건강을 가진 것 보다, 명예와 권력을 가진 것 보다, 힘이나 행복을 가진 것 보다, 훨씬 더 크고 놀랍도록 좋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부활의 생명이 있으니 얼마나 좋노! 라고 하며 살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신자 된 우리의 삶도 정작 따지고 보면 부활을 믿지 않는 혹은 부활을 갖고 싶어 하는 불신자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부활의 생명 때문에 좋아하기보다는 재산이 늘면 좋아하고 건강이 회복 되면 좋아합니다. 명예나 권력이 생기면 좋아합니다. 부활의 생명 때문에 좋아하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불신자들은 사람이 죽고 다시 사는 부활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노! 라고 하며 새로운 생명에 대한 기대감을 가집니다. 그러나 정작 그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우리 신자들은 그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좋아해야 하는 이유, 그것은 부활 때문입니다. 우리를 다시 일으키는 생명 때문 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노 하며 기쁘고 즐거워하며 감사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좋아하는 이유가 다른 것 때문이라면 우리는 생명을 갖고 있으면서도 마치 생명을 모르는 불신자와 같습니다.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자 같이 암울하고 어둡게 지내는 생명 잃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토록 크고 놀라운 부활의 생명이 있음을 불신자 유가족의 한 마디에서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좋겠노!’ 하시던 고인의 동생의 그 외침은 제게 주신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의 고귀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습니다. 고인의 가족들도 이 생명을 함께 받아서 이제 얼마나 좋노! 하고 즐거워하는 여생이 되기를 기도드립다 나팔수 강 승 구
우리 교회 자매님의 어머니께서 소천 하셨습니다. 73세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약 한 달 전에 병상에서 복음을 받아 들이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일어나시지 못 해 누우신 채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칠 십 평생을 신앙 없이 사시던 분이 노년에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 들이는 것은 과연 기적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성도가 되어 돌아가신 어머니의 입관 예배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 가셨으니 영원한 부활의 몸으로 다시 일어 날 줄을 믿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 가족들과 고인과의 마지막 작별 인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인의 남동생이 울면서 ‘목사님 말대로 부활하여 다시 일어나면 얼마나 좋겠노!’ 하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 우셨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겠노!’ 하는 불신자 가족의 외침이 제 마음에 메아리쳐 왔습니다. 정말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노? 라는 외침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하는 강한 불신앙의 외침이며 또 하나는 정말 그렇다면 나도 예수 믿고 부활하고 싶다는 신앙에 대한 갈망 입니다. 이것은 아직 복음을 모르는 불신자로서는 당연한 의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성경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 신자들은 과연 부활이 있음을 얼마나 좋아하고 사는가 하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요 11:25~26) 우리는 이 말씀을 믿고 사는 그리스도인들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좋겠노! 하는 그 좋은 약속을 이미 받고 사는 사람들 입니다. 이 좋은 약속은 죽음 이후가 아니라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이미 누리고 사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의 생명을 이미 가지고 살기 때문 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이 생명이 있음은 재산을 많이 가진 것 보다, 건강을 가진 것 보다, 명예와 권력을 가진 것 보다, 힘이나 행복을 가진 것 보다, 훨씬 더 크고 놀랍도록 좋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부활의 생명이 있으니 얼마나 좋노! 라고 하며 살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신자 된 우리의 삶도 정작 따지고 보면 부활을 믿지 않는 혹은 부활을 갖고 싶어 하는 불신자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부활의 생명 때문에 좋아하기보다는 재산이 늘면 좋아하고 건강이 회복 되면 좋아합니다. 명예나 권력이 생기면 좋아합니다. 부활의 생명 때문에 좋아하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불신자들은 사람이 죽고 다시 사는 부활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노! 라고 하며 새로운 생명에 대한 기대감을 가집니다. 그러나 정작 그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우리 신자들은 그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좋아해야 하는 이유, 그것은 부활 때문입니다. 우리를 다시 일으키는 생명 때문 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노 하며 기쁘고 즐거워하며 감사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좋아하는 이유가 다른 것 때문이라면 우리는 생명을 갖고 있으면서도 마치 생명을 모르는 불신자와 같습니다.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자 같이 암울하고 어둡게 지내는 생명 잃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토록 크고 놀라운 부활의 생명이 있음을 불신자 유가족의 한 마디에서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좋겠노!’ 하시던 고인의 동생의 그 외침은 제게 주신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의 고귀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습니다. 고인의 가족들도 이 생명을 함께 받아서 이제 얼마나 좋노! 하고 즐거워하는 여생이 되기를 기도드립다 나팔수 강 승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