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sion of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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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970회 작성일Date 25-06-05 16:32본문
어느 누구도 죽기위해 이 땅에 온 것이 자신의 삶의 목표요 의미라고 진술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죽음으로 자신의 삶을 마감할 것이란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을지라도
그 죽음이 삶의 목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죽음이 인생의 종착점이냐, 아니면 또 다른 시작을 향한 출발점이냐에 대해서는 서로 간에 차이점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인간의 삶 속에 반드시 속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조금만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 삶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인 분이 계셨습니다. 즉, 잘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잘 죽는다” 함은 죽음 그 자체보다도, 그 죽음에 주어진 의미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이 올바른 인식은 삶을 바르게 이끌어가는 동력을 제공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고로 선한 죽음은 결국 선한 삶과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이 고귀한 생명을 가장 아름답고 선한 모습으로 사시다 아깝지 않게 돌려주시고 가신 분,
그 분은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모두 다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 도도히 최고의 가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것이 정녕 사는 길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가시적으로 볼 때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것은 분명히 그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권력층이라 할 수 있는 종교지도자들의 탐욕이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이 무너지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목숨쯤은 결코 아깝지 않게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요 18:14)라는 어처구니없는 희생 논리 위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득권자들의 특징은 정작 자신들은 희생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이것이 그들과 예수님 사이를 갈라놓은 가장 큰 차이점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는 무지몽매한 백성들까지 동원해 거대한 산으로 다가오는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고야 마는 사람들이 그들이었습니다.
이미 자신을 다 주시기 위해 오신 분 앞에서 죽음으로 몰아넣을 음모를 품고 어설픈 변명을 둘러대며
협잡을 벌이는 그들을 묵묵히 바라보셨던 우리 주님의 심정을 생각해 봅니다.
다 주시기 위해 오셨는데 그것을 빼앗으려고 하는 인간의 욕심을 직시해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정은 생명도 아깝지 않게 주시는 것이지만 인간의 열정은 빼앗고 훔치는 욕심 그 자체였음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빼앗고 훔치려는 것이 하나님의 열정적 사랑이라는 것만이라도 깨닫는다면 이 세상은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통해 결국 훔쳐서라도 가져야 할 거룩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열정’입니다.
구원을 향한 열정, 사람을 향한 열정, 참 생명을 향한 열정, 그 열정들이 결국은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향한 열정을 품게 만드는 요인들이 되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우리 주님의 죽음을 향한 이 열정은 우리 믿는 이들에게 참 생명의 길을 향한 열정으로 되살아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위해 잘 죽으신 예수님의 열정은 오늘 우리에게는 잘 살기 위한 열정으로 되살아나 영생을 누리는 감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김 재 구 목사
물론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죽음으로 자신의 삶을 마감할 것이란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을지라도
그 죽음이 삶의 목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죽음이 인생의 종착점이냐, 아니면 또 다른 시작을 향한 출발점이냐에 대해서는 서로 간에 차이점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인간의 삶 속에 반드시 속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조금만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 삶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인 분이 계셨습니다. 즉, 잘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잘 죽는다” 함은 죽음 그 자체보다도, 그 죽음에 주어진 의미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이 올바른 인식은 삶을 바르게 이끌어가는 동력을 제공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고로 선한 죽음은 결국 선한 삶과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이 고귀한 생명을 가장 아름답고 선한 모습으로 사시다 아깝지 않게 돌려주시고 가신 분,
그 분은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모두 다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 도도히 최고의 가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것이 정녕 사는 길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가시적으로 볼 때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것은 분명히 그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권력층이라 할 수 있는 종교지도자들의 탐욕이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이 무너지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목숨쯤은 결코 아깝지 않게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요 18:14)라는 어처구니없는 희생 논리 위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득권자들의 특징은 정작 자신들은 희생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이것이 그들과 예수님 사이를 갈라놓은 가장 큰 차이점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는 무지몽매한 백성들까지 동원해 거대한 산으로 다가오는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고야 마는 사람들이 그들이었습니다.
이미 자신을 다 주시기 위해 오신 분 앞에서 죽음으로 몰아넣을 음모를 품고 어설픈 변명을 둘러대며
협잡을 벌이는 그들을 묵묵히 바라보셨던 우리 주님의 심정을 생각해 봅니다.
다 주시기 위해 오셨는데 그것을 빼앗으려고 하는 인간의 욕심을 직시해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정은 생명도 아깝지 않게 주시는 것이지만 인간의 열정은 빼앗고 훔치는 욕심 그 자체였음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빼앗고 훔치려는 것이 하나님의 열정적 사랑이라는 것만이라도 깨닫는다면 이 세상은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통해 결국 훔쳐서라도 가져야 할 거룩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열정’입니다.
구원을 향한 열정, 사람을 향한 열정, 참 생명을 향한 열정, 그 열정들이 결국은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향한 열정을 품게 만드는 요인들이 되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우리 주님의 죽음을 향한 이 열정은 우리 믿는 이들에게 참 생명의 길을 향한 열정으로 되살아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위해 잘 죽으신 예수님의 열정은 오늘 우리에게는 잘 살기 위한 열정으로 되살아나 영생을 누리는 감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김 재 구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