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끗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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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721회 작성일Date 24-04-27 14:51본문
삶을 사노라면 간간이 아쉬움을 나타내는 표현인 “불과 한 끗 차이였어!”라는 말을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한 끗 차이’는 ‘근소한 차이나 간격이 있음을 속되게 이르는 말’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모든 것이 시험으로 통합니다.
시험에 합격하느냐, 아니냐가 적정선의 점수를 넘기느냐 아니냐로 판가름 날 때 1점 차이로 고배를 마시는 경우는
그 한 끗 차이가 아쉬움이나, 안타까움을 넘어 절망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이 표현은 이렇게 간발의 차이에도 사용될 수 있지만 그 결과가 현저히 달라지는 경우에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상상과 망상은 한 끗 차이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생각을 한다는 점에서는 이 둘이 동일하지만 상상은 그 안에 노력이나 열정이 더해지며 실현 쪽으로 갈 수 있다면,
망상은 어떤 노력도 열정도 없는 공상의 세계 속에만 갇혀 있는 상태이기에 실현은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실현 가능이냐,
실현 불가능이냐는 열정이 뒷받침 된 노력이라는 한 끗 차이로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드는 상상이 되기도 망상이 되기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주님의 몸된 교회도 한 끗 차이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동일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고,
구원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고전 1:18).
이 십자가의 도를 거부할 것인가, 믿을 것인가라는 한 끗 차이로
이렇게 멸망과 구원으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라 할 수 있으며,
삶과 죽음을 가르는 차이이기에 그 믿음을 허락하시고,
받아주신 하나님께 영원히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끗 차이로 주님의 몸된 교회가 된 우리들 안에서도
또 한 끗 차이로 교회다움을 지킬 것인가, 아닌가로 갈라질 수 있습니다.
다음의 대조 문장 속에서 차이점을 찾아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가 달려 있기에 교회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있기에 교회이다.
차이점은 ‘십자가’라는 단어 다음에 붙은 ‘조사’인 ‘가’와 ‘에’라는 단 한 글자입니다.
그러나 그 한 끗 차이로 의미는 현저히 달라집니다.
“빛난다고 모두 금은 아니다. (All is not gold that glitters)”라는 서양속담이 있듯이
건물에 십자가가 달려 있다고 모두 교회인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는 것은 성도들이 십자가에 달려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인 삶의 좌우명이라 할 수 있는 ‘나는 죽고 예수로만 사는 삶’이 이루어집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이 성도의 교회다움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구절이 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자신의 육체가 살아나려 할 때마다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는 고백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거듭 자랑합니다.
십자가는 늘 그곳에 있지만 우리가 거기에 달려 있느냐, 아니냐의 한 끗 차이로 교회인가, 아닌가의 극명한 차이가 납니다.
김 재 구 목사
‘한 끗 차이’는 ‘근소한 차이나 간격이 있음을 속되게 이르는 말’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모든 것이 시험으로 통합니다.
시험에 합격하느냐, 아니냐가 적정선의 점수를 넘기느냐 아니냐로 판가름 날 때 1점 차이로 고배를 마시는 경우는
그 한 끗 차이가 아쉬움이나, 안타까움을 넘어 절망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이 표현은 이렇게 간발의 차이에도 사용될 수 있지만 그 결과가 현저히 달라지는 경우에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상상과 망상은 한 끗 차이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생각을 한다는 점에서는 이 둘이 동일하지만 상상은 그 안에 노력이나 열정이 더해지며 실현 쪽으로 갈 수 있다면,
망상은 어떤 노력도 열정도 없는 공상의 세계 속에만 갇혀 있는 상태이기에 실현은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실현 가능이냐,
실현 불가능이냐는 열정이 뒷받침 된 노력이라는 한 끗 차이로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드는 상상이 되기도 망상이 되기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주님의 몸된 교회도 한 끗 차이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동일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고,
구원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고전 1:18).
이 십자가의 도를 거부할 것인가, 믿을 것인가라는 한 끗 차이로
이렇게 멸망과 구원으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라 할 수 있으며,
삶과 죽음을 가르는 차이이기에 그 믿음을 허락하시고,
받아주신 하나님께 영원히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끗 차이로 주님의 몸된 교회가 된 우리들 안에서도
또 한 끗 차이로 교회다움을 지킬 것인가, 아닌가로 갈라질 수 있습니다.
다음의 대조 문장 속에서 차이점을 찾아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가 달려 있기에 교회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있기에 교회이다.
차이점은 ‘십자가’라는 단어 다음에 붙은 ‘조사’인 ‘가’와 ‘에’라는 단 한 글자입니다.
그러나 그 한 끗 차이로 의미는 현저히 달라집니다.
“빛난다고 모두 금은 아니다. (All is not gold that glitters)”라는 서양속담이 있듯이
건물에 십자가가 달려 있다고 모두 교회인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는 것은 성도들이 십자가에 달려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인 삶의 좌우명이라 할 수 있는 ‘나는 죽고 예수로만 사는 삶’이 이루어집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이 성도의 교회다움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구절이 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자신의 육체가 살아나려 할 때마다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는 고백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거듭 자랑합니다.
십자가는 늘 그곳에 있지만 우리가 거기에 달려 있느냐, 아니냐의 한 끗 차이로 교회인가, 아닌가의 극명한 차이가 납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