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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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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2,141회 작성일Date 16-07-23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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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창원의 기온이 섭씨 33.5도를 기록하고 기상대에서는 폭염 주의보를 발표한 날 오후, 저는 시내에서 볼 일을 보고 교회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너무 더운 날씨 때문인지 거리에는 걸어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이 한적했습니다. 해는 강렬한 자외선으로 위에서 부터 열기를 쬐어 오고 보도블록에서도 지열이 올라와서 아래에서도 더운 열기가 뿜어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까뮈 ‘이방인’의 주인공 메르소가 떠올랐습니다. 정당방위로 사람을 죽인 주인공 메르소가 법정에서 태양 빛이 너무 강렬해서 사람을 죽였다고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므로 사형을 언도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정직한 최후를 맞게 되어서 행복하다고 하며 소설의 끝을 맺습니다. 작가는 주인공을 통해 실존에 정직한 인간의 모습을 그림으로서 자신을 속이고 사는 이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다는 평을 받는 작품입니다. 실존에 정직하다는 것은 나의 느낌 그대로를 표현하고 행동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짧은 보행자 건널목을 건너는데 흰 승용차 한 대가 횡단보도 중간을 가로 막은 채 정차하고 있었습니다. 횡단보도에 차를 세운 운전자가 밉기는 했지만 할 수 없이 승용차 앞을 지나서 건널목을 지나려고 횡단보도에 들어섰습니다. 바로 그 때, 이 흰 차가 슬쩍 저를 밀듯이 앞으로 나왔습니다. 순간적으로 뛰다 시피 건널목을 지나서 그 차의 운전석을 향해 째려보았습니다. 머릿속에는 아직 메르소의 대사가 맴돌고 있고 상황은 상대 운전자의 잘못입니다. 저는 마치 태양 빛이 너무 강렬해서 사람을 죽였다는 이방인의 주인공 같이 운전자를 향해 소리를 쳤습니다. ‘사람이 지나가는데 차를 밀고 나오면 나를 치겠다는 것입니까?’ 그러자 운전석의 창문을 내리면서 안경을 낀 운전자가 ‘죄송합니다’ 하며 사과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계속 다그치며 항의를 했습니다. 기분 같아서는 차 문을 열어 제치고 운전자를 끌어내서 주의를 주고 싶었지만 갑자기 제 마음에 스치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저 사람이 예배드리러 너희 교회에 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 한 마디에 태양 빛 아래서의 저의 실존은 바뀌어졌습니다. 그래서 ‘운전 조심 하십시오’ 겸연쩍은 한 마디를 남기고 총총 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다시 걸어오면서 까뮈를 생각했습니다. 실존주의 소설의 대표 작가로써 이십대부터 노벨 문학상 수상 후보에 올랐고 사십대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천재 작가이지만, 그가 그린 주인공의 세계는 하나님 없는 실존이었습니다. 정직한 것이 실존주의라면 그 실존은 하나님께서 내어 버려두신 비참한 실존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내어 버려두심이 가장 무서운 형벌이라고 했습니다. (롬 1: 24, 26, 28) 나의 실존에 정직 한 것은 어쩌면 가장 큰 형벌을 겪고 사는 인간의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른바 ‘나는 할 말은 다 한다’ 라든지, ‘나는 속에 있는 것을 감추지 못 한다’ 는 식의 표현은 모두 하나님의 간섭 없이 내 멋대로 내뱉고 내 마음대로 저지르고 살겠다는 메르소와 같은 생각일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실존주의자 키에르키고르는 실존에서 본질을 찾아 가는 것이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본질 되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가는 것이 실존에 충실한 모습이지, 실존 그 자체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죄인의 형상입니다. 그 순간 제 마음에 스쳐 지나가는 그 음성은 저를 실존 그대로 내어 버려두지 않으시고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었음을 고백합니다. 말하고 싶을 때 말하지 못하게 나의 생각을 붙잡아 주시고, 화내고 싶을 때 화 낼 수 없도록 나의 마음을 다스려 주시는 그 손길이 있으므로 저는 오늘도 내어 버려진 실존에서 본질 되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갑니다. 혹시 그 흰 색 승용차 운전자가 이 글을 읽는 기회가 있다면 나는 그 분께 사과와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내가 기독교 실존주의자임을 확인 시켜주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나팔수  강 승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