밧세바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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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2,490회 작성일Date 16-07-02 12:59본문
밧세바의 유혹
오랜만에 아내와 딸과 함께 한가로이 카페에서 커피 타임을 즐겼습니다. 조용한 음악을 배경으로 창 밖에는 초여름의 화창한 햇빛이 내리 쬐고 있었습니다.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던 아내가 놀란 듯이 ‘어머, 저 여자 봐!’ 라고 말했습니다. 방학을 맞이해서 잠깐 귀국한 딸도 한 참 자기 반 학생들 이야기를 하다가 아내의 갑작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딸 역시 흥미로운 광경을 보듯이 약간 놀라는 듯 표정을 지었습니다. 마침 안경을 벗어서 탁자 위에 놓고 있었던 저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아도 무엇을 보고 아내와 딸이 그렇게 놀라는 듯 했는지 보이지 않으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뭔 데 그래? 하고 묻자, 아내의 답변인즉, 어느 여자가 건너편 건물 옥상에서 웃옷을 벗더라는 것입니다. 여자가 옷을 벗는다? 순간 얼른 안경을 끼고 그 광경을 보고 싶었으나, 아내와 딸 앞에서 벗어 놓은 안경까지 찾아 쓰면서 여자 옷 벗은 것을 본 다는 것이 체면 상 그럴 수 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껏 한다는 말이 ‘밧세바 인가?‘ 라고 썰렁한 조크를 던지고 말았습니다. 6월의 초 여름, 더운 날씨에 어느 아주머니가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하지 않고 잠깐 웃옷을 벗었던 것 같은데, 그 모습에서 밧세바의 유혹을 연상했으니 이것도 목사의 직업의식에서 나오는 반응인가 싶습니다. 어스름한 저녁, 다윗 왕이 예루살렘 성 지붕 위를 한가로이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봅니다. 보려고 본 것이 아니니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여인이 심히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삼하 11:2) 밧세바가 얼마나 아름다운 여인이었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그 때 다윗의 마음에는 이미 유혹이 시작되었습니다. 유혹은 상대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시작 되는 것 같습니다. 밧세바의 미모 보다는 그 여자의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보고 있다는 그 마음이 이미 유혹이었습니다. 다윗은 드디어 그를 자기에게로 부릅니다. 그리고 간음을 저지릅니다. (삼하 11:4) 유혹이란 그런 것입니다. 세상의 화려함이 우리를 유혹함이 아니라 그 세상의 화려함을 쫓아가는 내 마음이 나를 유혹합니다. 여자가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여자를 탐하는 나의 마음이 나를 유혹으로 이끕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의 간음을 지적하셨습니다. (마 5:28) 그러나 내가 내 마음을 사로잡지 못 합니다. 내 속에는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롬 7:20) 인간은 타락하여 그 속에 죄가 여전히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죄를 다스릴 수 있는 분은 오로지 성령님 뿐 이십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서 죄를 다스려 주셔야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여러 가지 상황과 환경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의 육체를 통해서 우리 속의 죄를 이기게 하십니다. 마음을 다스리시는 분이 우리의 몸과 생활도 다스리십니다. 그 다스림이 간혹 간섭 같아서 귀찮을 때도 있지만 그 다스림이 우리를 유혹에서 부터 지켜 주는 방패이고 흉배 입니다. 그 날 제 시력을 붙잡으셔서 유혹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우리 앞에 당면한 문제들이 너무 많아서 세상의 유혹에 넘어 갈 틈이 없게 하심, 또한 성령님의 도우심 입니다. 너무 편안해서 자살률이 높다는 유럽의 어느 나라 보다 너무 많은 인생의 문제 때문에 세상의 유혹에 눈 돌릴 틈 없음, 또한 하나님 주신 은혜 입니다. 그 바쁨과 문제들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유혹을 이기는 성도의 삶인가 싶습니다. 밧세바는 항상 우리 앞에 있습니다. 다만 내가 다윗과 같이 한가로이 거닐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녀를 볼 틈이 없을 뿐입니다. 유혹은 밧세바가 아니라 내 마음 입니다. 그 마음을 지켜 주시는 분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우리를 채우시는 성령님이십니다. 나팔수 강 승 구
오랜만에 아내와 딸과 함께 한가로이 카페에서 커피 타임을 즐겼습니다. 조용한 음악을 배경으로 창 밖에는 초여름의 화창한 햇빛이 내리 쬐고 있었습니다.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던 아내가 놀란 듯이 ‘어머, 저 여자 봐!’ 라고 말했습니다. 방학을 맞이해서 잠깐 귀국한 딸도 한 참 자기 반 학생들 이야기를 하다가 아내의 갑작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딸 역시 흥미로운 광경을 보듯이 약간 놀라는 듯 표정을 지었습니다. 마침 안경을 벗어서 탁자 위에 놓고 있었던 저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아도 무엇을 보고 아내와 딸이 그렇게 놀라는 듯 했는지 보이지 않으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뭔 데 그래? 하고 묻자, 아내의 답변인즉, 어느 여자가 건너편 건물 옥상에서 웃옷을 벗더라는 것입니다. 여자가 옷을 벗는다? 순간 얼른 안경을 끼고 그 광경을 보고 싶었으나, 아내와 딸 앞에서 벗어 놓은 안경까지 찾아 쓰면서 여자 옷 벗은 것을 본 다는 것이 체면 상 그럴 수 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껏 한다는 말이 ‘밧세바 인가?‘ 라고 썰렁한 조크를 던지고 말았습니다. 6월의 초 여름, 더운 날씨에 어느 아주머니가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하지 않고 잠깐 웃옷을 벗었던 것 같은데, 그 모습에서 밧세바의 유혹을 연상했으니 이것도 목사의 직업의식에서 나오는 반응인가 싶습니다. 어스름한 저녁, 다윗 왕이 예루살렘 성 지붕 위를 한가로이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봅니다. 보려고 본 것이 아니니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여인이 심히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삼하 11:2) 밧세바가 얼마나 아름다운 여인이었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그 때 다윗의 마음에는 이미 유혹이 시작되었습니다. 유혹은 상대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시작 되는 것 같습니다. 밧세바의 미모 보다는 그 여자의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보고 있다는 그 마음이 이미 유혹이었습니다. 다윗은 드디어 그를 자기에게로 부릅니다. 그리고 간음을 저지릅니다. (삼하 11:4) 유혹이란 그런 것입니다. 세상의 화려함이 우리를 유혹함이 아니라 그 세상의 화려함을 쫓아가는 내 마음이 나를 유혹합니다. 여자가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여자를 탐하는 나의 마음이 나를 유혹으로 이끕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의 간음을 지적하셨습니다. (마 5:28) 그러나 내가 내 마음을 사로잡지 못 합니다. 내 속에는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롬 7:20) 인간은 타락하여 그 속에 죄가 여전히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죄를 다스릴 수 있는 분은 오로지 성령님 뿐 이십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서 죄를 다스려 주셔야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여러 가지 상황과 환경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의 육체를 통해서 우리 속의 죄를 이기게 하십니다. 마음을 다스리시는 분이 우리의 몸과 생활도 다스리십니다. 그 다스림이 간혹 간섭 같아서 귀찮을 때도 있지만 그 다스림이 우리를 유혹에서 부터 지켜 주는 방패이고 흉배 입니다. 그 날 제 시력을 붙잡으셔서 유혹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우리 앞에 당면한 문제들이 너무 많아서 세상의 유혹에 넘어 갈 틈이 없게 하심, 또한 성령님의 도우심 입니다. 너무 편안해서 자살률이 높다는 유럽의 어느 나라 보다 너무 많은 인생의 문제 때문에 세상의 유혹에 눈 돌릴 틈 없음, 또한 하나님 주신 은혜 입니다. 그 바쁨과 문제들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유혹을 이기는 성도의 삶인가 싶습니다. 밧세바는 항상 우리 앞에 있습니다. 다만 내가 다윗과 같이 한가로이 거닐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녀를 볼 틈이 없을 뿐입니다. 유혹은 밧세바가 아니라 내 마음 입니다. 그 마음을 지켜 주시는 분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우리를 채우시는 성령님이십니다. 나팔수 강 승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