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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기도와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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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2,038회 작성일Date 20-04-19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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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은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깊이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게 되는 시간들입니다. 예수님을 묵상하노라면 그 뒤를 따랐던 제자들의 삶까지도 같이 패키지로 돌아보게 됩니다. 이번 주간에는 특히 겟세마네에서 벌어진 사건을 많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극적인 대조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소여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때로 그 대조는 우리 삶의 정황 속에서도 흔히 벌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더 그랬습니다. 예수님께 겟세마네는 땀이 피가 되도록 투쟁하는 장소였다면, 제자들에게는 피곤한 몸을 아늑하게 쉬게 하는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오가며 힘겨운 씨름을 했다면, 제자들은 세 번 모두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게 쉬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을 잡으려고 칼과 몽둥이를 들고 군사들이 들이닥쳤을 때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동의 차이입니다. 그렇게도 극렬하게 세 번에 걸쳐 씨름을 거듭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그 상황을 받아들이십니다. 그런데 편안히 잠들어 있었던 제자 중의 한 명이 칼을 빼서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귀를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서에 따르면 이 사람은 베드로이고 귀가 잘린 사람은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라고 합니다(요 18:10). 온 밤을 지새며 극렬하게 투쟁한 전사였던 예수님은 고요히 멈추고, 아무 움직임도 없이 자고 쉬었던 제자들은 갑자기 전사로 돌변합니다. 왜 이렇게도 다를까요? 그것은 바로 기도와 칼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자신이 원하시는 것을 끊어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밤새도록 씨름하신 것은 육신의 계획과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부단한 전쟁이었습니다. 결국 기도는 하나님의 뜻으로 귀결되며 그 뜻을 묵묵히 받드는 길로 나아가게 합니다. 기도를 통해 자신의 두 손을 완전히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포기를 이루어 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두 손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기도가 아닌 칼을 들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들의 욕망을 이룰 계획이 이미 서 있습니다. 자신의 가슴팍에 칼이 준비되어 있으니 언제든지 필요할 때 그 칼을 휘둘러 원하는 것을 이룰 준비가 되어있기에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시며, 그 나라는 칼과 창으로 상대방을 제압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희생과 헌신, 섬김의 십자가로 이루실 것이라 누누이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칼을 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칼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그 결과를 분명히 아시기 때문입니다. 칼로 흥한 나라는 칼로 망한다는 것이 불변의 진리입니다. 칼로 막아내면 더 강한 칼이 저항해 들어오기에 칼은 또 다른 칼을 부릅니다. 즉 무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 하면 다른 무력이 늘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길이고 십자가의 길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또 다른 십자가를 이끌고 그렇게 희생하고 낮아지는 섬김은 어느 누구에게도 악감정을 심어주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이 바로 그 십자가의 길입니다. 칼은 상대방을 죽여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목적이기에 늘 죽음의 그림자가 붙어 다닙니다. 그러나 기도는 나를 죽여 상대방을 살리는 것이니 그곳에는 생명의 향기가 넘쳐나며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시는 부활생명으로 그 결론에 이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칼이 아닌 기도의 승리이며 우리 모두를 오늘도 그 생명의 길로 이끌어갑니다. 주님 부활하신 이날 세상을 찌르는 칼을 버리고, 세상을 품는 기도로 부활생명에 동참하시길 축원드립니다. 
김재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