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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화분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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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975회 작성일Date 20-06-07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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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살아가노라면 어느 누구든지 여기저기서 화초나 나무가 심긴 화분을 선물 받는 경우들이 꽤 있을 것입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금까지 꽤나 많이 화분 선물을 받은 것 같습니다. 올 스승의 날에도 감사하게 화분 몇 개를 선물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지금 집에 두고 있는 화분은 모두 대여섯 개 정도입니다. 물론 이곳저곳 이사를 다니며 정리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제대로 못 키우고 죽인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그런데 전문가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화분에 심겨진 화초나, 나무들을 보면서 한 가지 정리되는 생각이 있습니다. 공통적으로 모두 다 화분 크기만큼만 자라다 끝을 맺는다는 점입니다. 화분 크기 이상을 넘어가는 종류를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 이유는 화분 크기만큼 자라다 그 한계를 견디지 못하여 말라서 죽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그랬을 것이라고 봅니다. 만약 때에 맞추어서 화분 갈이를 해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랬다면 아마도 지금 저희 집은 화원 수준은 아니어도 집안이 화초로 가득한 공간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유사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화분은 분명이 사람이 만든 것이고, 그 크기도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것은 언제나 그 크기에 제한이 있고 그 한계는 분명합니다. 이와 같이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우리 또한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든 화분에 갇혀 성장이 멈추어져 있을 수 있습니다. 긴 세월 쌓아온 지식과 경험이 발목을 잡을 수도 있고, 주변에 형성되어 있는 인맥이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주의와 이념 또한 장애요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분갈이를 해야 할까요? 예전에 교육목사로 사역하며 청년부를 이끌 때 한 자매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시편 1편을 읽으며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한다”는 내용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길인 희생하고 헌신하는 낮아짐의 척박한 광야 같은 삶까지도 견디어 내며 이기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시냇가에 심긴 나무같이 좋은 환경에서야 누가 열매를 맺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열매 맺기 위해 인위적으로 좋은 환경을 찾아 그곳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 것이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 질문을 받고 감사했던 것은 그 자매가 최소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고난도 감수할 마음의 그릇이 준비된 진심을 본 것이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시냇가에 심기어진 나무”는 상징적인 의미로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대로 행하는 삶”이 바로 그와 같은 환경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환경이 어렵든지, 쉽든지, 광야든지, 옥토든지에 상관없이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며 행하는 삶이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가 되게 한다는 것도 덧붙였습니다. 또한 시편 92편의 내용과 연계하여 그 시냇가는 곧 여호와의 집에 심기운 삶이며 그곳에 심길 때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고, 진액이 풍족하며, 잎이 청청한 삶”을 사는 길이라는 것도 설명했습니다(시 92:13-15). 화분 이야기를 하다가 이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심겨야 할 최고의 장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지켜 행하는 삶을 살아갈 때 마침내 하나님의 집이 우리의 화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인위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나이에 관계없이 우리는 종려나무같이 엄청난 양의 결실을 맺는 삶이 될 것이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하늘을 향해 높이 성장하는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김재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