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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고난의 떡과 고난의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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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2,297회 작성일Date 20-12-24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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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대세’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이 진행되어 가는 결정적 형세’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는데 따르느냐, 거스르느냐에 따라 돌아오는 파급효과는 극적으로 갈릴 것입니다. 대세를 따른다는 것은 무리 없이 다수에 섞여서 그 이익을 함께 나누는 길로 가는 것이라면, 대세를 거스른다는 것은 다수의 비난을 감수해야 함은 물론 홀로 남겨지는 공포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싫든 좋든 대세를 거스르기 싫어서 목소리를 내야 할 때 침묵하게 되고, 침묵해야 할 때 대세의 뜻을 따라 아바타가 되어 소리치는 부조리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공동체 속에서 홀로 남겨진다는 것은 때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된다는 것을 상상만으로도 짐작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반드시 따라가야 할 삶의 기준이 되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대세가 기준이 되고, 심지어는 법이 되어 버젓이 삶의 규율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대세가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미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삶의 법이 주어져 있으니 대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열왕기와 역대기에 동시에 나타나는 북이스라엘 아합 왕 시절의 미가야 선지자 이야기입니다. 아합 왕이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에게 예전 북이스라엘 땅이었던 길르앗 라못을 회복하기 위해 아람과의 전쟁에 동참할 것을 부탁합니다. 여호사밧 왕이 동참할 것을 허락하며 여호와의 뜻을 묻자고 합니다. 이에 아합이 자신의 수하에 있는 사백 명의 선지자들을 모읍니다. 이들 모두는 이구동성으로 “올라가서 싸우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리이다”(왕상 22:12; 대하 18:11)라고 외쳐댑니다. 대세가 정해졌습니다. 감히 누가 이 400명의 우렁찬 소리를 뚫고 다른 抹(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호사밧 왕이 이상함을 느꼈는지 다른 선지자는 없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아합 왕이 미가야라는 사람이 있으나 자신에게 흉악한 일만 예언함으로 미워한다고 답합니다. 미가야가 참 선지자라면 흉악한 일만 예언한다는 것은 곧 계속해서 아합이 선을 버리고 악한 길로만 가고 있다는 것이며, 인생의 속성인 듣고 싶은 것만 듣고자하는 죄성이 살 길을 막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미가야가 호출됩니다. 호출하러 간 사신이 미가야에게 이미 대세는 정해졌으니 고생하지 말고 대세를 따르라 조언을 합니다. 그러나 미가야는 완강히 여호와의 말씀만 전할 것이라고 응답합니다. 그리고 400명의 선지자들이 위시해 있는 그곳에서 미가야가 대세를 거스르며 이 전쟁에서 아합이 죽을 것임을 선포합니다. 그 대가로 그는 ‘고난의 떡과 고난의 물’을 마셔야 했습니다. 대세를 따르는 거짓 선지자들 400명은 당분간은 호위호식하며 잘 지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 속에서든지, 교회 안에서든지 대세를 거스른다면 때로 고난의 삶을 감수해야 할 수 있습니다. 미가야가 그러한 고난까지도 감수하며 진리의 말씀에 생명을 내어놓을 수 있었던 것은 아합과 그 수하에 위시해 있는 이 땅의 보잘 것 없는 유한한 대세를 보는 것이 아니라, 권능의 하늘 보좌에 앉아계신 영원한 대세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왕상 22:19; 대하 18:18).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 또한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48)고 말씀하신 예수님만이 대세임을 확신할 때 진리 안에 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떡과 생명의 물’이 되시는 대세라는 것을 믿을 때 기꺼이 세상에서 잠시잠깐의 ‘고난의 떡과 고난의 물’을 감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재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