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와 살림의 기적이 가리키는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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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970회 작성일Date 20-11-06 14:38본문
성경 속에는 구약과 신약의 구별 없이 놀라운 기적의 역사들이 가득합니다. 그 중에는 갖은 질병과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들 또한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공생애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고, 죽음에서 살아나는 경우도 여러 번 나타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치유의 역사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치유 역사는 모든 사람들이 질병에서 그와 같이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확신 있게 말합니다. 즉 질병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삶의 길이니 반드시 치유와 회복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위해 신유를 위한 기도가 필요하며 거기에 치유를 확신하는 절대적인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환우들에게 있어서 치유의 은혜보다 더 간절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 질병이 이 땅의 내로라하는 의사들까지 두 손을 다 든 경우라고 한다면 신적인 간섭으로 인한 치유는 최고의 소망이 될 것입니다. 아직까지 그러한 불치병을 경험해 보지 못한 인생으로서 신앙적인 치유와 회복에 대하여 가타부타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자격미달이라는 사실을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감히 성경적 치유가 의도하는 바를 나누려 하는 것은 그 본질이 무엇인가를 전하려는 의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치유 이적은 주로 예수님의 공생애 초반에 밀집되어 나타납니다. 그리고 죽은 이를 살리는 사건은 공생애 기간 동안 세 번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치유 이적에서 의문이 가는 것은 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치유하고, 모든 사람을 나사로처럼 다시 살아나게 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죽은지 나흘이 되어 뇌와 몸의 모든 기능이 다 멈춘 것은 고사하고 이미 부패가 진행되어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사람도 살리시는 능력이시라면 비록 뼈밖에 남지 않았을지라도 공동묘지에 가서 능히 모두를 일으켜 세우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서는 단지 38년된 병자만 한 사람 일으켜 세우시고, 그 외의 다수는 그대로 두셨습니다. 이스라엘 전 인구로치자면 역시 치유와 살림의 회복을 경험한 사람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순히 그 외의 사람들은 믿음이 없어서라고 하기에는 변명이 궁색합니다. 결국 치유도, 살림도 예수님께서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행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명백한 사실은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거나,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도 또 죽습니다. 그것은 기정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모르실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더욱 중요한 방향을 가리키기 위해 치유와 살림의 역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즉 치유와 살림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보여주려는 방향이 목적지인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입니다.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입니다. 그 곳에는 눈물이 없고, 사망이 없으며, 애통도 없을 것이고, 어떤 질병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림자 같은 이전 것들이 다 지나갔기 때문입니다(계 21:4).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살아갈 때만 기대할 수 있는 나라 그 나라가 있다는 것을 지금 현재 맛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를 지금 현재 누리고 있다면 우리의 상태가 환우이든, 아니든, 죽음을 앞두고 있든, 아니든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최고의 희망을 간직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이 낡아져 가는 장막 집에서도 이미 영생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재구 목사
예수님의 치유 이적은 주로 예수님의 공생애 초반에 밀집되어 나타납니다. 그리고 죽은 이를 살리는 사건은 공생애 기간 동안 세 번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치유 이적에서 의문이 가는 것은 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치유하고, 모든 사람을 나사로처럼 다시 살아나게 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죽은지 나흘이 되어 뇌와 몸의 모든 기능이 다 멈춘 것은 고사하고 이미 부패가 진행되어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사람도 살리시는 능력이시라면 비록 뼈밖에 남지 않았을지라도 공동묘지에 가서 능히 모두를 일으켜 세우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서는 단지 38년된 병자만 한 사람 일으켜 세우시고, 그 외의 다수는 그대로 두셨습니다. 이스라엘 전 인구로치자면 역시 치유와 살림의 회복을 경험한 사람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순히 그 외의 사람들은 믿음이 없어서라고 하기에는 변명이 궁색합니다. 결국 치유도, 살림도 예수님께서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행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명백한 사실은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거나,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도 또 죽습니다. 그것은 기정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모르실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더욱 중요한 방향을 가리키기 위해 치유와 살림의 역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즉 치유와 살림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보여주려는 방향이 목적지인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입니다.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입니다. 그 곳에는 눈물이 없고, 사망이 없으며, 애통도 없을 것이고, 어떤 질병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림자 같은 이전 것들이 다 지나갔기 때문입니다(계 21:4).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살아갈 때만 기대할 수 있는 나라 그 나라가 있다는 것을 지금 현재 맛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를 지금 현재 누리고 있다면 우리의 상태가 환우이든, 아니든, 죽음을 앞두고 있든, 아니든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최고의 희망을 간직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이 낡아져 가는 장막 집에서도 이미 영생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재구 목사